"제게 문학은 놀이 같은 느낌입니다. ‘게임’이 아니라는 의미지요. 승부를 걸고 작전을 세우고 룰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놀이에서는 신명이 필요할 뿐, 룰은 중요하지 않잖아요."
소설가 전상국(강원대 국문과 교수)씨가 8편의 중·단편을 모은 소설집 ‘온 생애 한 순간’(문학과지성사 발행)을 냈다. 햇수로 9년 만이다. 12일 모처럼의 기자간담회에서 "욕 먹을 얘기인지 모르지만"이라는 단서를 단 놀이로서의 문학론, 룰에 얽매이지 않는 글쓰기론은 그간의 과작(寡作)에 대한 변(辨)이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쓰고자 하는 것과 쓰여진 것 사이의 괴리, 즉 욕망의 높이와 깊이에 미치지 못하는 글의 비릿함에 대한 자기 경계거나 역설적 욕심으로도 들렸다.
가령, 책의 맨 앞에 실린, 가장 최근작이라는 ‘물매화 사랑’의 한 대목은 그 같은 짐작에 힘을 실어준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모두 게임이다. 게임에는 전략이 필요하다. 내 본질을 감추어야 하는 일, 속이고 또 속여야 한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지쳤다." 이 작품은 시부모와 남편 등과의 갈등으로 가지울이라는 곳에 칩거한 채 말을 잃고 압화(押花)로 소일하는 ‘나’가, 요양을 온 듯한 한 남자와 말 없이 나누는 교감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통상, 관계는 언어 위에서 언어를 통해 성립하지만, 발음되는 언어는 사물과 관계의 본질에 닿지 못한다. "(그것이) 말을 많이 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도 그 실체가 속속들이 보이는 그런 관계의 만남이다." 그 발화되지 않는 말은, 화자인 ‘나’의 속마음처럼 "내 앞에 없고, 앞으로도 없을 그 어떤 것에 대한 꿈꾸기" 아닐까.
작가가 천착하는 삶의 본질은, 작품들이 집요하게 묘사하는 ‘실종’ ‘고립’ ‘부재’의 틈을 통해 드러난다. 실종은 죽음과 다르다. 그것은 생명을 유지한 채 기억의 지층 속으로 함몰하는 것이며, 재현의 막연한 가능성으로 하여 부재의 상실감을 극대화하는, 이를테면 또 다른 존재의 형식이며, 그 가치를 확인시키는 극단적인 방식이다.
작품 속 ‘실종’들은 마을 남자들의 감춰진 욕망을 드러내는 여인의 실종(‘소양강 처녀’)이거나, 존재론적 의미와 자유에 대한 열망의 상징처럼 읽히는 무성생식 개체의 증발(‘플라나리아’), 반공포로 출신으로 자폐적 삶을 살아가는 한 남자의 죽음(‘너브내 아라리’) 등으로 이어진다. ‘실종’이라는 제목의 작품에서 작가는, 그 불확실성의 폭력성을, 남은 자가 감당해야 하는 기다림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우리는 실종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 실종의 의미에는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실종, 개구리소년 등 사건 속의 실종도 있겠으나, 자아 부재 혹은 자아 과다 속에 갈팡질팡하는 우리 자신의 실종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8월이면 20여년 몸 담았던 교단을 떠난다. 그는 "이제 슬슬 게임을 할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이 ‘게임’이 앞서 말한 그 ‘게임’과 다른 의미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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