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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4) 최소공간과 최대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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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4) 최소공간과 최대공간

입력
2005.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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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모 대학 도서관. 작은 책상 하나에 별의별 것이 다 들어있다. 한 사람의 생활살이가 다 들어있는 것 같다. 취직 수험서와 영어 참고서가 주요 내용을 이룬다. 전공책은 없다. 전공이 무슨 소용이랴. 영어 잘해서 취직하는 일만도 너무 버거운 일인데. 칫솔 치약과 수건, 물컵과 휴지도 있다. 이곳이 생활의 터전인 걸 알 수 있게 해준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최소공간이다. 한 사람에게 필요한 최소공간이 어디까지인지를 묻는 퀴즈를 보는 것 같은 애잔함이 인다.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젊은이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최소공간의 극단은 휴대폰과 인터넷이다. 무형이기 때문에 작아질 수 있는 한 작아진다. 반도체 칩 하나가 도서관 하나에 맞먹는다며 아기 손 만한 기계 속에 세상이 다 있는 것 같은 착각의 세계이다. 미니 홈피는 자기만의 왕국이다. 모니터 몇 장에 하나의 왕국을 이룰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최소공간들은 달팽이 껍데기나 호두 껍데기 같은 철저한 자기 방어막을 치는 행위이다. 어머니 자궁 속 같은 편안한 휴식의 공간단위가 아니라 무엇인가에 놀라 쫓겨 숨어들어간 동굴 같은 것이다. 이런 최소공간들에서는 지극히 폐쇄적인 개인사만 난무한다. 나이 30이 넘어서도 자기 사진 몇 장 올려놓고 좋아라 낄낄거리며 소일한다.

같은 시각 근교 골프 연습장. 시골이고 평일이고 대낮인데도 중대형 승용차 10여대가 늘어서있고 사람들은 따악 따악 소리를 내며 골프연습에 열중한다. 골프가 보편화하면서 수요가 늘어난 것이긴 하지만 공한지에 세금 피해가는 편법으로 이용되는 측면이 강하다. 공사비 적게 들고 일정한 수입도 들어오기 때문이다. 크면 클수록 좋은 공간이 골프 연습장이다.

비슷한 시각 대형마트. 역시 사람들로 넘쳐난다. 장보러 나온 가정주부뿐 아니다. 남녀노소가 골고루 섞여있다. 더 이상 식구들 반찬거리 사러오는 공간이 아니다. 집밖의 생활을 주도하는 당연성을 확보했다. 숭고한 공간에 근접하고 있다. 같은 시각 백화점을 보자. 돈은 많고 시간은 남아나는 사람들 놀이터가 된 지 오래이다. 이런 대형마트나 백화점 역시 골프 연습장처럼 크면 클수록 더 좋은 공간이다. 골프 연습장보다 몇 백배 더 적나라하게 크기에 비례해서 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골프 연습장과 대형마트, 모두 최대공간이다. 주어진 조건과 상황 아래에서 커질 수 있는 한 커지는 공간이다. 아니, 커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그래서 클수록 미덕인 공간이다. 여기에 고층 아파트까지 가세했다. 서울 시내는 물론이고 최근 전국의 시골에는 산을 삼킬만한 골프 연습장이 크게 늘고 있다. 골프 연습장은 혼자 생기지 않는다. 고층 아파트와 대형 마트가 항상 붙어 다닌다. 호젓한 시골은 거의 다 깨졌다. 시골도 평수의 논리가 지배하기 시작한 지 꽤 되었다.

최소공간과 최대공간의 양극단이 혼재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공간이 양극으로 갈리는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후기 산업사회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공간의 종류,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 공간에 투영된 사회적 상징성 등이다. 이를테면 최소공간과 최대공간이 도서관 좌석과 골프 연습장으로 갈리며 대립하는 현상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대립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경제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도 적절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에 따라 사회의 인적 인프라가 깨지면서 개인들이 갈피를 못 잡고 희생되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구도 1960년대에 이와 비슷한 현상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집을 캡슐 개념으로 정의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사람 한 명이 가정 하나가 되는 초핵가정이었다. 최소공간의 극단이었다. 그 반대편에서는 쇼핑몰, 문화 인프라, 거대기업 사옥 등 집단의 개념이 반영된 대형공간이 급하게 부상했다. 최대공간이었다.

1960년대 서구의 건축가들은 이 문제를 매우 정밀하게 다루었다. 최대공간을 이루는 복합 요소로 최소공간을 환치해냄으로써 현대건축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주의 복합공간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최소공간이 개인을 집단에서 분리시키고 극단적 외톨이로 만드는 소외의 위험을 막을 수 있었다. 최대공간은 가급적 공공건물에 할당했다. 이것이 기업사옥이나 상업 공간 등 사적 영역의 건물일 경우에는 숨통이 트일 여백, 휴식 공간, 실내정원이나 녹지요소, 휴먼 스케일의 골격처리 등 공공요소를 가능한 한 많이 집어넣었다.

우리의 최소공간과 최대공간에는 이런 것이 없다. 최소공간 속에서 개인은 점점 축소적 소외에 집착한다. 처음에는 이것을 서글프게 받아들이고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희망을 안 버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감상적이 되고 자학적이 되면서 병리적으로 빠져든다. 고시촌의 고시원은 좋은 예이다. 반드시 고시를 붙겠다는 열망만으로 버티는 건 아니다. 처음에는 이런 열망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자신의 적성을 찾을 기회조차 주지 못한 사회, 자신을 고시로 내몬 사회, 계속 고배를 마시게 한 사회, 이런 사회에 대한 증오와 반발이 커지면서 그 복수로 개인을 자학하는 마이크로 집착증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의 최대공간은 어떠한가. 상업 공간에 치우친 정도가 심하다. 대형공간은 상품을 가득 채우기 위한 평수와 체적으로 환산된다. 대형공간에서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초코파이를 몇 박스 쌓을 수 있는가이다. 코엑스 전시장이나 고속철 역사 같은 대형 공공건물들도 등장하기 시작하지만 심심한 거대박스로만 남는다. 골격은 하이테크 양식으로 미래적 세련됨을 갖추었지만 정작 그 속에 있는 개인은 차갑고 중성적인 대형 공간 속에 버려진 것 같은 소외감을 느낀다.

최소공간의 또 다른 대표선수인 화장실을 보자. 젊은이들의 고민이 솔직하게 표출된다는 대학 화장실 낙서. 시대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성적인 낙서는 어느 시대에나 있는 본능이니 넘어가자. 1980년대에는 독재 권력을 규탄하는 시국 선언문이 주류를 이루었다. 1990년대에는 매판 자본이니 하는 경제 정의나 미군철수 등의 민족적 자각을 분출했다.

2000년대에는 학벌의 고민이나 종교적 주장 등이 눈에 띈다. 연대 화장실에 ‘고법(고대 법대) 만세’라고 써놓는다거나 지방 캠퍼스 화장실에 서울 캠퍼스와의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이 토로되는 식이다. 기독교의 배타적 횡포를 비판하는 글도 많다. 삭막한 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두려움도 주요 소재이다. 학벌 문제는 개인의 이익과 관련된 점에서 최소공간의 개념에 대응될 수 있다. 반면 종교 문제나 경제 논리는 집단화한 거대 권력과 관련된 점에서 최대공간의 개념에 대응될 수 있다.

리 사회에서 최소공간과 최대공간은 섞이지 못하고 대립적 쌍개념으로 마주보고 있다. 개인은 점점 소외되어가며 최소공간의 작은 세포 속으로 침잠한다. 개인주의가 극단화한다. 반면 집단은 상업논리에 완전히 지배당하면서 돈으로만 계산이 되는 최대공간에 매달린다. 경제논리에 편승하지 못한 많은 개인들은 최소공간 속에서 허우적댄다. 반면 이것에 성공한 소수는 최대공간을 자기 것으로 가지며 누린다. 도시 공간은 점점 대형 상업건물이 점령해간다. 개인은 경제 메커니즘의 톱니가 잘 돌아가게 해주는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개인은 자기만의 최소공간에 갇혀 있다가 기껏 대형 상업공간에서 물건이나 사고 황량한 도시 거리를 배회하다가 다시 자기만의 최소공간으로 들어가는 삭막한 주기만이 반복되는 현실,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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