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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집착 - 내 속의 '질투' 이토록 질길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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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집착 - 내 속의 '질투' 이토록 질길 줄이야

입력
2005.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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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나는 죽고, 더 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진실이란 죽음과 연관되어서만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는 글의 진정성에 대한 화자의 이 독한 각오로 소설 ‘집착’을 연다. 유서(遺書)가 아닌 다음에야, 아니 어쩌면 유서조차도 가능할까 싶은 순도 100%의 진실에 작가가 집착하는 까닭은, ‘집착’ 그 자체가 글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집착은 한 남자를 향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열여덟 해 동안의 결혼생활을 끝낸 뒤 다시 얻은 자유를 놓칠까 두렵고 싫증이 나기도 해서 스스로 놓아버린, 하지만 금세 다른 여자의 사람이 되어버린 남자에 대한 사후적 집착이다. 자크 라캉이 말한 ‘타자화된 욕망’이고 통상 질투라고 할 때의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이다.

‘나’는 질투의 감정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이다. 남자가 주저하며 알려준 여자의 나이 직업 등 지극히 파편적인 정보들을 토대로 그녀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몸달아 한다. 그의 사소한 행동과 농담조차 끊임없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자료다. "내가 만나는 여성들의 육체가 (모조리) 그 여자의 육체로 탈바꿈"하고, 꿈에서조차 그 강박적 사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에게 무단 점령을 당한 상태였다." 고통으로 미쳐버릴 지경인데, 아직 미치지 않았음을 그 고통을 통해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다. 방자(放恣)를 꿈꾸기도 한다. "여기에 글을 쓰고 있는 행위도, 어쩌면 (그 여자의 형상을 본뜬 허상에다) 바늘을 꽂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33쪽) ‘나’의 집착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 집착을 노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명색이 ‘나’는 자의식 강한 지성인이다.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내가 대량생산되어 대체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해주는 증거다. 상대 여자와 다른 나의 모든 모습은 항상 나의 열등감을 자극하고, "내 존재 전체를 평가절하"하게 만든다. 심지어 "그 여자가 운전할 줄 모르고 면허시험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지적 탁월함의 징표"가 된다.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호언해 온 작가이니 만큼 소설의 화자인 ‘나’는 작가의 분신이다. 작가는 질투하는 ‘나’(자신)의 황폐한 내면을, 소설 첫 문장의 다짐처럼 처참하게 뜯어 발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쇼생크보다 견고한 그 타자의 지옥에서 탈출한다. 소설은, 그러니까 집착에 대한 치열한 내면 투쟁의 기록, 지옥의 탈출기인 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골방에 앉아 싸이 미니홈피며 블로그의 비밀공간에서 분투하고 있을 수많은 이들이여. 은밀한 동지가 필요한가.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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