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선옥씨가 새 연작소설 ‘유랑가족’을 냈다. 그는 6편의 소설로 이 시대의 ‘가난’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무책임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야기하고 있다’니…. 그 표현은 아무래도 부적절하다. 왜곡이라고 해도 좋을 엉터리 같은 표현이다.
‘…새기고 있다’고 고쳐 써본다. 그가 전하는 가난의 질감이 약간은 살아나는 것 같다. 조각 칼을 쥔 손마디의 굳은 살과 팔뚝의 힘줄, 이마며 얼굴에 맺힌 땀냄새가 언뜻 비치는 듯도 하다. 하지만, 이 표현 역시 어설프고 작위적이기까지 하다. 소설 속 삶이 마주한 그 벼랑들에 비해 삼각 칼이 스친 단면의 느낌은 너무 가볍다. 그 한숨과 비애, "눈물마저 보타부런"(214쪽) 마른 울음들을 담기에는 턱없이 얕다.
‘…응시한다’고 하면 어떨까. 딴은, 이 소설 속 가난들은 호들갑스러운 형용사나 부사의 거듦 없이 물기 없는 정황으로 전달되고는 있다. 해서, 가난의 슬픔 역시 눈물콧물 쥐어짜는 통곡의 비통함이 아니라 "깊이를 알 수 없는 평온한 슬픔"(187쪽)이다. 흔히들 ‘뜨거운 가슴’과 구색을 맞춰 등장하는 ‘차가운 이성’이라는 말에서의 그 차가움이 아니라, 어쩔 도리 없어 못 보고 못 들은 척 낯빛 꾸미면서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그런 차가운 응시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제 속에 도사린 비정(非情)"한 응시이고, 그 비정에 스스로 "진저리 치는"(171쪽) 응시다.
하지만 ‘…응시한다’고 했을 때의 그 응시는 이 소설의 문체와 문장 형식은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내용과 깊이, 디테일을 담아내지는 못한다. 냉정히 따지자면, ‘비정한 응시’ 역시 가난에 대한 작가의 응시가 아니라, 독자의 응시, 우리의 응시이기 쉽다.
해서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소개하라면, ‘작가는 자신이 응시한 이 시대의 가난을 절제된 문장으로 새기듯 이야기한다’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겠다.
이제, 도대체 어떤 가난이냐는 궁금증에 답할 차례다. 그 가난은 후기산업사회의 피폐한 농촌과, 농촌사회의 해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도시빈민의 삶, 거기에 얽혀 든 동포와 외국인들의 이식(移植)된 가난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난에 쫓겨 절망하지만 살아야겠기에 끊임없이 유랑하는, 해서 유랑이 삶의 형식이 되어버린 뿌리 잘린 존재들이다. ‘무서운 형벌’ 같은 삶이고 가난이다.
그 가난은 관념이 아닌 실재다. 그것은 가계소득 얼마로 범주화할 수 없고, 정치경제학적 계급·계층론이 범접하지 못하는, 이를테면 사연이다. 감기 같은 제 가난을 두고 백혈병에나 걸린 듯 흥감을 떨어대는 내성(耐性) 결핍의 영혼들이 습관처럼 달고 사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관념으로서의 가난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니, 이 소설 속 가난의 내용을 3분 다이제스트로 옮기려는 시도 역시 허튼 짓이기 쉽다. 그것은 서산 마애삼존불을 두고 백제인들이 만든 돌부처라고 말해버리는 것과 같다.
이 소설을 조금 먼저 읽은 자의 거친 느낌이라도 대보라면, 그간 주절대온 상투적 가난이, 호들갑이 한없이 부끄럽더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소설 속 가난의 사연들은 가난의 범주화나 계층론적 접근의 공허함에 대한 가난한 자들의 ‘보타버린’ 눈물이더라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겠다.
평론가 방민호씨가 해설에다 써놓은 "먼 훗날 누가 21세기 벽두에 한국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가 하고 물을 것이라면 우리는 이 물음에 대비한 타임캡슐 안에 이 소설을 넣어두어도 될 것"이라는 감상은 "~넣어두어야 한다"로 고쳐져야 한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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