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함께 추억을 팝니다." 서울 중구 회현지하상가. 충무로와 회현동을 잇는 이 지하상가를 천천히 걷다보면 통로 한쪽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이 마술처럼 귀를 유혹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카메라점, 중고우표상, 옷가게, 안경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한켠에 LP레코드를 산처럼 쌓아둔 중고레코드점 10여 곳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비틀스 풍으로 장발을 기른 사내들이 발장단을 해가며 비좁은 가게 안에서 수천 장의 음반들을 정리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이곳은 국내 최대의 중고레코드 상점가다. 주로 LP레코드가 중심이지만 CD, LD, DVD는 물론이고 도우넛판으로 불리는 SP, 플라스틱 레코드의 전신인 1920~30년대의 돌(石)레코드까지 있다. 가게들을 순회하고 나면 음악박물관을 다녀온 느낌이 들 정도다.
우리나라에 중고 레코드시장이 형성된 시기는 60년대 중반. 일명 ‘달러골목’으로 불렸던 명동 중앙우체국 일대와 광화문, 정동 일대에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레코드들을 수집한 음악상들이 차렸던 각종 ‘음악사’들이 그 효시다. 그러나 도심 재개발로 땅값이 치솟자 90년대초 비교적 임대료가 싼 이곳으로 중고 레코드상들이 대거 옮겨와 정착했다.
중고음반의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라이센스 앨범의 경우 LP나 CD 모두 1장당 2,000~5,000원선에 팔린다. 원반은 1만~5만원선이다. 일반적으로 가요보다는 팝송, 팝송보다는 클래식 음반이 비싼 편이지만 보관상태, 레이블의 희소성 등에 따라 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그리스어로 ‘하얀 손수건’을 부르는 나나 무스크리의 프랑스제 LP음반은 15만원대, 스위스의 거장 앙세르메가 지휘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LP음반은 70만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보통 1만~5만장의 음반을 보유하고 있는 가게들은 주인들의 개성만큼이나 취급품목도 다양하다. ‘클림트’나 ‘종운음악부’는 클래식 전문, ‘마에스트로’나 ‘애플’은 올드록과 스탠다드팝 위주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LP음반 마니아들이다. 음대생, 음악평론가, 음악방송 PD,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드라마 소품 담당자들도 종종 눈에 띈다. 30년간 3,000여장의 음반을 수집했다는 고성환(53·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씨는 "LP음반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스피커, 턴테이블, 앰프, 카트리지를 일일히 점검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며 "이는 클릭 한 번이나 버튼 한 번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CD나 MP3 등에서 느낄 수 없는 매력"이라고 말했다.
음악 마니아들을 상대하느니만큼 이 거리의 가게 주인들은 좋은 음반을 구하기 위해 외국으로 건너가 3,4주씩 머물기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정성을 들인다. 주인들 가운데는 수만장의 음반을 소장하던 마니아였다가 아예 가게를 차린 경우도 상당수다. "좋은 음악을 많이 듣다 보면 소유욕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음악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는 기쁨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곳 가게들은 장사도 장사지만 대여섯평 좁은 공간이 음악과 예술을 논하는 애호가들의 ‘사랑방’으로 변하기 일쑤다. 96년부터 ‘클림트’ 를 운영중인 김세환(45) 대표는 "음반이 많아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귀면서 음반을 모으게 된다는 것이 성공한 가게들의 공통점"이라며 "바쁘고 각박한 디지털의 세계에서 사람 냄새 나는 아날로그의 여유를 이곳에서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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