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선 등 의식해 각국 ‘철군 기회’만 노려
이라크 파병국들이 조기 철군론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내의 선거, 미군의 오발 사고 등 다양한 이유로 철군 문제가 정치쟁점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의 반전여론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파병한 국가들도 이라크 총선이 민주적으로 치러지고 안정을 되찾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속속 떠날 채비를 하는 추세다.
미국, 영국에 이어 3번째로 많은 3,600명의 병력을 파병한 한국은 정부가 여당 일각에서 제기된 단계적 철군론을 일축하고 연말까지는 자리를 지키겠다는 뜻을 견지하고 있다.
1만 2,400명의 병력을 파병한 영국에서는 5월 5일 치러지는 총선을 앞두고 철군론이 주요 선거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전쟁 2주년을 맞아 반전여론이 들끓고 있고, 철군지지 여부가 각 선거구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집권 노동당의 의원 17명마저도 표를 의식해 공개적으로 이라크전쟁 반대를 외치고 있다.
3선을 노리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올해 말까지 주둔할 것이라는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제스처를 보이고 있다. 잭 스트로 영국 외무장관을 통해 "이라크 정부가 떠나기를 원한다면 영국군은 언제든지 떠나겠다"고 내비친 것이다. 특히 3일에는 내년 4월까지 이라크 주둔군의 병력규모를 3,500명까지 단계적으로 감축한다고 일정을 못박기도 했다. 재선에 성공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는 달리, 블레어 총리는 조기철군을 요구하고 있는 자유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의 공격을 받고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느끼고 있다.
미국의 대(對) 테러정책을 적극지지하고 있는 이탈리아도 사정은 마찬가지. 이달 초 미군의 오인사격으로 자국 정보요원이 사망한 후 반미반전(反美反戰) 여론이 국내에서 극에 달하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대통령은 조기 철군론을 언급하며 내년 총선을 준비하고 있다.
부시 미 대통령의 설득으로 발표 하루 만에 병력(3,169명) 철수계획이 번복됐지만, 야당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있어 뜨거운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다른 파병국들의 철군 도미노는 이미 시작됐다.
몰도바(12명)와 포르투갈(150명)은 지난달 파병연장을 하지 않고 곧바로 병력을 철수시켰고, 우크라이나도 같은 달 15일 전체병력 1,600명 가운데 150명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데 이어 올 10월까지 단계적으로 철군을 완료할 예정이다. 36개국까지 치솟던 이라크 파병국들은 25개국(미국 제외)으로 줄어든 상태다.
불가리아(450명)도 올해 말까지 철군한다. 14일에 병력 160명을 본국으로 철수시킨 네덜란드는 미국과 영국의 주둔압력을 거부하고 내달 중순까지 잔류 병력 800명을 완전 철수시킬 계획이다. 폴란드는 전체 병력 1,700명을 7월 부분 철수시킨 뒤 연말까지 완료할 예정이다.
지난해에는 2월 니카라과(115명)를 비롯해 스페인(1,400명·4월), 도미니카(300명·5월), 온두라스(370명·5월), 필리핀(51명·7월), 태국(450명·8월), 뉴질랜드(60명·9월), 통가(44명·12월), 헝가리(300명·12월) 등 9개국이 국내 여론 등의 악화로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치안유지의 임무를 이어받을 이라크 방위군은 아직 저항세력에 대항할 힘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미군도 주 방위군 동원병력의 교체시기가 다가오고 있어 고민에 빠져 있다.
고성호기자 sungho@hk.co.kr
■ 레니에 모나코국왕 타계/세기의 로맨스 '행복한 왕자' 아내 그레이스 켈리 곁으로
레니에 3세는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세계에 ‘세기의 로맨스’의 추억을, 모나코에는 막대한 부(富)를 남겼다. 그는 1923년 모나코 공국의 샤를로트 공주와 피에르 드 폴리냑 백작 사이에서 태어나 49년 조부의 사망으로 왕위를 승계했다. 2차대전 때 프랑스 군으로 참전해 무공훈장을 받은 20대의 독신 국왕은 유럽 사교계의 총아였다. 뭇 여성들은 레니에 3세를 흠모했고, 그는 세계적 플레이보이로 명성을 높였다.
56년 그레이스 켈리와의 만남은 한편의 영화와 같았다. 켈리는 거장 히치콕 감독과 모나코 몬테카를로시 트위스티산의 도로에서 영화를 찍고 있었고, 숙명처럼 그곳을 지나던 레니에 3세와 만났다. 켈리는 당시 인기의 절정에 있었다. 모나코 대성당에서 거행된 결혼식은 젊은 왕자님과 우아하고 단아한 용모의 여배우가 만난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였다.
세기의 결혼식이었던 만큼 호사가들의 뒷이야기도 끊이지 않았다. 레니에 3세와 켈리는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모나코에 강한 영향력이 있던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의 의도된 작품이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침체기에 있던 모나코의 관광산업을 부흥하려는 레니에의 쇼맨십과 오나시스의 사업적인 계산이 맞아 떨어졌다는 추측이 돌았다.
실제로 레니에 3세는 정치력도 상당했다. 인구 3만명에 크기가 2㎢가 채 안될 정도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를 프랑스의 합병 위협으로부터 지켰다. 다른 유럽의 입헌군주와 달리 행정권을 가지고 있던 그는 1959년에는 국민 회의를 해산 시키고 국정을 직접 장악했다.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62년 재빨리 국민 회의를 부활시키는 노련함도 보였다.
그는 모나코 주식회사의 유능한 CEO이기도 했다. 그는 즉위하자 마자인 50년 유명한 F1 그랑프리인 몬테카를로 랠리 자동차경주를 시작했고, 74년에는 국제서커스를 창설했다. 두 가지 모두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켈리와의 이별도 현실이 아닌 영화 같았다. 켈리는 82년 막내딸인 스테파니 공주와 함께 자동차를 타다가 절벽 아래로 추락해 숨졌다. 사고지점은 자신이 영화를 찍던 그 길이었다. 호사가들은 켈리가 은막에 복귀하려 했으나, 왕실과 국민들의 반대로 무산돼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입방아에 올렸다. 하지만 레니에 3세는 켈리를 잊지 못하고 여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두 딸인 캐롤라인 공주와 스테파니 공주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있고, 왕위 계승자인 알베르 왕자도 47세의 나이에 미혼이다. 60년 가까이 재위한 레니에 3세는 현존하는 왕실 중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 왕위를 지킨 군주이기도 했다.
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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