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서거와 관련한 뉴스 홍수 속에 찰스 영국 왕세자의 재혼식 연기 소식이 들렸다. 찰스 왕세자는 35년이나 사귄 연인 카밀라와 결혼하기 위해 8일로 날을 잡았다. 다이애나 비가 죽은 뒤 이런저런 눈치를 보며 오랫동안 벼르던 재혼이다. 그런데 교황이 서거하고 공교롭게도 장례일이 같은 날로 정해지는 바람에 난감하게 됐다. 온 세계가 애도하는 날, 조촐하게나마 경사를 치르기가 마땅치 않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재혼식을 하루 미루고, 대신 장례에 참석하기로 한 것은 온당한 결정으로 비친다.
■ 충성스런 언론도 그렇게 평가했으나 한편 다른 얘기도 나온다. 윈저 궁에서 열릴 혼인식을 주재할 캔터베리 성공회 대주교와 하객을 대표할 블레어 총리가 미리 장례 참석을 발표하는 바람에 도리가 없었으리란 추측이다. 왕실의 권위가 걸린 혼인식을 성속(聖俗)의 두 우두머리 신하가 참석하지 않은 채 치를 수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를 두고 이웃나라 언론은 ‘딱한 찰스’라고 논평했다. 대중과 왕실 모두 달갑지 않게 여긴 여인과 오랜 기다림 끝에 이룬 결혼이 출발부터 교황의 큰 그림자에 온통 가려지게 된 것을 비아냥과 동정 섞어 빗댄 것이다.
■ 이런 가운데, 이번 일을 찰스 개인의 불운을 넘어 영국적 제도의 실패로 풀이한 논평이 눈길을 끈다. 왕실과 종교와 정치가 함께 교황의 도덕적 권위에 무릎 꿇었다는 해석이다. 영국은 16세기 헨리 8세가 왕비와의 이혼을 막은 로마 교회와 결별하면서 신교인 성공회를 국교로 삼았고, 반 가톨릭 전통을 유지했다. 이에 따라 역대 교황 장례에 대주교와 총리가 참석한 예가 없다. 이 500년 전통을 한꺼번에 허문 것은 그만큼 요한 바오로 2세의 인류를 위한 헌신과 업적이 영국 왕실과 종교와 정치를 압도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이런 논평은 왕실과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이 인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위해 진정으로 힘썼는지 묻고 있다. 마찬가지로, 저마다 최고의 찬사로 요한 바오로 2세를 추모하는 각국 지도자들이 과연 그의 모범을 얼마나 따르는지 회의한다. 그래서 그의 장례에 사상 유례없이 많은 각국 지도자가 모이는 것도, 이 시대의 진정한 위인으로 추앙되는 교황의 큰 그림자에 자신들의 이기심과 죄악을 숨기려는 몸짓으로 본다. 대교황의 그림자가 넓은 만치 인류 평화와 정의의 현실은 어둡다는 얘기다.
강병태 논설위원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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