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새 산문집 '시간의 눈금' 펴낸 소설가 이윤기/ 시간을 넘나드는 '유목민'의 삶 풍경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새 산문집 '시간의 눈금' 펴낸 소설가 이윤기/ 시간을 넘나드는 '유목민'의 삶 풍경

입력
2005.04.06 00:00
0 0

소설가 이윤기(58·사진)씨는 3년 전 이맘때 경기 북부의 한 동네 시골집에 작업실을 꾸리고 부터 해마다 나무를 심고 있다. 그렇게 심은 나무가 어느새 1,000여 그루에 이른단다. 듣자니, 어른 허리높이에서 찰랑대던 녀석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키 두 질을 넘겨 자랐고, 더러는 잔망스럽게도 자기네끼리 2세목을 두기도 했다고 한다. 그게 멀찍이서 보면 벌써 제법 숲의 풍경을 지었다는 것이, 그가 새 산문집 ‘시간의 눈금’(열림원 발행) 끄트머리에 풀어놓은 은근한 자랑이다.

그런데 그게 당혹스럽다. 그는 우리 시대 유목민의 한 전범이 아니던가. 말(馬)에서 내려 서면 땅 멀미를 할 것 같던 그이지 않던가. 그런 그가 숲을 가꾼다니…. 그러니, 어느새 7권째에 이른 그의 이 낯선 산문집을, 존재 부정으로도 들리는 이율배반적 고차원 함수의 문제집이자 해설서라고 해도 과히 무리는 아니지 싶다.

이번 책에는 과거시제로 쓰여진 것들이 유달리 많다. 여기저기 다닌 끝에 눈 앞에 아른거리는 잔상들을 움켜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오래 침전된 것들로 쓴 것 같다는 인상이다. 10여년 전 미국 생활이며, 30여년 전 베트남 참전 경험, 유년의 고향에서 겪은 일, 청년기의 독서 편력 등이 도드라져 보인다는 의미다. 그것은 그의 사유의 모태라고 짐작되는 신화적·고고학적 과거와는 또 다르다. 기록된 과거가 아니라 기억된 과거, 그래서 훨씬 아련하게 실감나는 과거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행했던 무수한 나라 내가 지나쳤던 무수한 도시들은 천천히 내 뇌리를 떠나고 있다. 그 자리에 내 삶의 중심인 고향의 선산 자락이 들어서고 있다. 고향의 선산 자락은 변하지 않는다. 신화도 변하지 않는다. 흙도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래된 미래’이기도 하고, ‘장차 올 과거’이기도 하다. ‘예스터-모로(yester-morrow)…"(‘오래된 미래’)

회고는 떠돌다 멈춘 지점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그리고 멈춤은 회귀, 귀의의 의지를 내장한 경우가 많다.

텃밭이라도 일궈본 경험이 있다면 밭에 가하는 오뉴월 하루 볕의 위력을 안다. 그 역시 요즈음 봄 여름에는 잡초에 매여 먼 나들이를 못한다. 그러니 수십 년 함께 놀던 동무들은 그의 변신이 영 못마땅한 모양이다. "자네 말이야, 시골 땅 뙈기 하나 차지하더니 그것 수발 드느라고 아주 조선팔도를 잃어버린 것 같아." 그는 친구의 꾸짖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일망무제 백사장에서 모래 한 줌 움켜쥔 어리석음을 꾸짖은 것이다."(‘한 소인배의 항소이유서’) 자성 끝에 그는 썼다. "하지만 풍경을 짓는 자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를 여행하는 이에게 AD와 BC 같은 것은 잊어버리라고 권하는 사람이다. "예스터-모로, 어제와 내일이 혼재하는 시제를 살고 싶어"하고, "어제와 내일의 이음매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시제를 초월한, 신화의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의 고차 함수 문제의 해답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도 하다. 나무가 어제와 내일의 이음매라면 숲을 가꾸는 것은 시간의 고리를 잇는 행위일 것이고, 머문다는 것은 유목의 중단이 아니라 항구적 유목의 터전. 곧 하나의 오아시스를 짓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회귀와 머묾은 유목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그는 시간을 아우르고, 시간의 흐름을 초극하는 유목민이 되고자 하는 것일까. 그는 이 봄 또 시골집 터에 나무를 심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