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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窓] 교황서거가 되살린 죽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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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窓] 교황서거가 되살린 죽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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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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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봄날에 들려온 교황의 서거 소식은 죽음은 물론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언론 매체마다 그의 죽음을 특집으로 다루는 것을 보면, 온 세계가 그의 타계를 계기로 죽음에 대한 깊은 명상에 잠긴 듯하다. 혹시 그는 이승에 남은 자들에게 저 세상을 방문할 수 있는 ‘황금가지’를 자신의 마지막 선물로 남기고 간 것은 아닐까? 지하 세계를 구경할 수 있는 통행증 말이다.

과연 저 세상은 어떤 세계일까? 언제 우리 모두는 여행객에서 거주자로 신분이 바뀔 것인가?

매일 뉴스를 통해 보고 듣는 것이 죽음인데, 유독 교황의 죽음이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풍 갔다가 먼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소리라도 들었단 말인가? 아니면 육체로부터 떨어질 줄 모르는 그림자를 이제야 발견했단 말인가? 죽음은 수백 개의 팔을 가지고 수천 갈래의 길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그에게 쫓기면 뛰어들 문은 많은데 빠져 나올 출구가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거리의 사람들은 생명에 취해 잠시 그의 존재를 잊은 듯하다. 겨울이 봄으로 변장한 것에 속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에피쿠로스가 말했듯이, 죽음은 가장 무서운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은 없고,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는 없게 되니 아예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인가?

죽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죽음에 대해 너무도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진 우리에게 한 인간의 죽음이 충격으로 와 닿는 것 자체가 봄처럼 새롭기만 하다. 영국의 소설가 E. M. 포스터는 죽음은 인간을 파괴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죽음 속에는 어쩌면 죽순처럼 올라오는 새싹이 있다. 다만 보지 못할 뿐이다.

죽음은, 4세기 가톨릭 주교인 암부로스에 의하면, 악인에게는 난파이지만 의인에게는 평화의 항구에 닻을 내리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마침내 평화의 항구에 도달한 듯이 보인다.

오늘도 난파의 위험과 악몽에 시달리는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은 그의 무사한 안착을 기뻐한다. 반면 자신의 부러진 돛과 새는 갑판을 보면서 공포에 떨고 있다. 어떻게 죽음이 위로와 안식이 될 수 있는지 반신반의 하고 있다. 라사로처럼 죽음을 이긴 것 같은데 이렇다 말이 없으니, 그가 떠난 하늘을 자꾸만 바라본다, 불안하게.

최병현 호남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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