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일이다. L선생님 반의 한 아이가 틈만 나면 교실 컴퓨터 시건장치 고리를 뜯고 인터넷을 했다. 일요일에도 창문을 통해 교실로 들어가 몰래 컴퓨터를 사용하곤 했는데, 결국 꼬리가 밟혀 지도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 후로도 컴퓨터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여 창문을 넘었다.
상담실에 맡겨진 아이의 사정은 알고 보니 딱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예 얼굴도 모르고 자랐고, 어머니는 장애가 있어 생활능력이 없기 때문에 모자(母子)가 이모집에 얹혀사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母子)가 각기 큰이모와 작은이모 집에 떨어져 사는 처지였으니 그 곤궁함을 어찌 말로 다할까. 가정환경 조사서에는 집에 컴퓨터가 있다고 써놓은지라, 그것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그저 이유 없이 고약한 행동을 하는 아이로 오인되기 쉬웠다. 물론 살고 있는 집에 컴퓨터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사촌형제들의 것이었다. 친형제 간에도 컴퓨터를 두고 신경전에 쟁탈전을 벌이는 것이 요즘 아이들 아닌가. 사람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의기소침한 표정과 태도는 서러운 생활환경이 만들어낸 것일 터였다.
"부장 선생님! 아이에게 컴퓨터를 지급해 주세요."
아이의 처벌 여부를 놓고 고심하던 교육정보부장 선생님은 뜻밖의 제안에 잠시 어리둥절한 듯했다. "요즘 아이들 차라리 밥을 굶을지언정 컴퓨터 없이는 못살죠."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정보부장 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인다. 한 달 후 컴퓨터를 지급받은 아이는 점차 표정이 밝아지고 2학기에는 성적이 많이 향상되었다. 추레하던 외양도 말쑥해졌다. 아이는 대학갈 때 컴퓨터 관련 학과에 지망하겠다며 겸연쩍은 미소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교사들은 4월초가 되면 연례행사처럼 감기몸살을 앓는다. 학사업무가 폭주하는 3월에는 아플 여가조차 없기 때문이다. 일이 많다보면 담임교사가 아이들의 가정환경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는 일도 자연 늦어지게 마련인데, 그런 와중에 학비감면이나 극빈자 컴퓨터 무상지급과 같은 혜택을 놓치는 아이들이 생길 수도 있다.
물론 공지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조종례 시간을 통해서 내용을 공지하고, 가정통신문을 발송하며, 학교홈페이지에도 안내문이 뜬다. 그런데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경우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는 아이는 많지 않다. ‘생활보호대상자, 극빈자, 결손가정’ 등의 용어는 아이들을 더욱 숨고 싶게 만든다. 그래서 학비지원 신청 같은 일을 진행할 때는 아이들이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
"요즘 우리 나라 경제 상황이 어렵다는 것은 모두들 잘 알고 있을 거야. 집집마다 형편이 어려워서 부모님들 고생도 심하실 거고……. 말씀은 안 하시지만, 요즘 가정 형편이 어려운 것 같아서 부모님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은 친구는 내게 말하도록 해. 등록금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잡부금 또는 급식비 등을 면제받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살다보면 사정이 좋을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는 법이지. 잘 살 때 부모님이 세금을 많이 냈기 때문에 어려울 때는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는 거야. 부모님이 힘든 줄도 모르는 무신경한 아들은…… 글쎄…… 칭찬받기 어렵지……."
잠시 뜸을 두어 교실 전체 분위기를 살핀다. 시선을 딴 데 두거나 고개 숙인 아이가 없다면 크게 상심한 아이들은 없는 것이다. 이럴 때 낚싯대를 낚아채듯 아이들의 마음을 끌어당겨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쉬는 시간에 상담실로 와! 선착순이야! 늦으면 국물도 없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요, 저요"하면서 교실 뒷문으로 서너 명의 아이들이 튀어나간다. 하하, 녀석들.
아이들은 부모나 교사의 말 한마디에 크게 고무되기도 하고 상심하기도 한다. 가정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아이에게 말하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쉽사리 나아질 상황이 아니라면 가정 사정을 솔직담백하게 설명하고 학비지원을 조속히 신청해야 한다. 공연히 부모 자존심을 세우려다가 등록금을 제때에 납부하지 못하여 아이의 자존심에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형편이 어려울 때 국가로부터 지원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고, 부끄러운 일은 더욱 아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을 꿋꿋하게 이겨내며 잘 교육받은 아이는 장차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신규진 서울 경성고 상담전문교사 '가난하다고 실망하는 아이는 없다' 저자sir90@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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