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로 남아시아 지진해일(쓰나미) 발생(작년 12월 26일) 100일이 된다. 한비야(47)씨는 아직도 몸서리친다. 4년 전 오지탐험가에서 난민구호활동가로 변신한 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전쟁터, 이란 지진 등 수많은 현장을 누볐지만 이렇게 끔찍한 재앙은 처음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최대의 재난이었습니다. 48시간 대기조라서 3일 만인 12월 29일 아침 스리랑카로 출발했는데 생지옥이 따로 없었죠."
한씨는 국제 구호·개발기구인 월드비전 한국의 긴급구호팀장이다. 2일 오후 잠시 귀국한 그는 "옷 갈아 입으러 들렀다"고 했다. 그만큼 전세계를 발로 뛴다. 물자 배분 담당인 그는 1주일간 인도 최남단 깐냐꾸마리(‘땅끝마을’이라는 뜻)에서 쓰나미 피해 어민들에게 어선과 그물을 주고 왔다. "공교롭게 3월 28일 밤 9시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 다시 강진이 덮쳤어요. 해안 1㎞ 밖으로 대피하라는 경보를 들었지요. 새벽 2시 반에 대피하는 1만여 명의 표정은 두려움과 경악 그 자체였어요."
그는 실어증에 걸린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다. "12살짜리 무스타파는 해일이 몰려올 때 안고 있던 여동생 에드나(8)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에드나가 떠내려가면서 ‘무스타파, 톨롱 톨롱(오빠, 살려줘 살려줘)’하며 외치던 소리가 귀에 쟁쟁하답니다. 그 때 동생을 더 꽉 잡았어야 했다며 울더군요. 어린이 쉼터에서 하는 심리치료는 별 게 아니고 실컷 울고 실컷 슬퍼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너희는 피해자가 아니고 용감한 생존자다, 무서운 쓰나미도 너희들을 이기지 못했다’고 말해 줬습니다."
그는 재난 초기에는 철저히 숙련된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긴급구호에서는 90일 전까지가 응급실과 중환자실이라면 지금은 회복실에 온 상태입니다. 지역 경제 회복이 중요한 시점이지요. 다 살려놓고 이제 관심을 저버리면 되겠습니까?"
그는 남의 나라를 경제력으로만 평가해 주눅들거나 가난하다고 우쭐하는 자세는 이제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외국에서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가장 지원을 많이 받은 나라인데도 이제 와서 후원에 인색하다는 불만을 접할 때는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하지만 세계 월드비전 중에서 한국 지부는 1991년부터 수혜국에서 후원국으로 전환한 유일한 경우라는 사실을 말해 주면 박수갈채가 쏟아지곤 합니다."
한씨는 6월 말쯤 7번째 책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가제)’를 낸다. 완벽한 지도를 가져야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고정관념을 넘어서라는 의도로 쓴 긴급구호에 관한 책이다. 원고 마무리하느라 단잠도 반납한 그는 3일 낮 내전 중인 아제르바이잔으로 날아갔다.
박석원기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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