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문화인류학자 야마구치 마사오(山口昌男)는 메이지(明治) 유신으로 패자(敗者)가 된 바쿠후(幕府) 번벌(藩閥) 출신이 일본 특유의 모더니즘 문화의 주역이라고 보는 사람이다. 바다 건너 수입한 서양의 병기로 무장한 뒤 근왕(勤王)과 바쿠후 타도를 외치며 봉건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사쓰마(薩摩)·조슈(長州) ‘촌놈’ 정권에 굴종하기 싫었다고 할까. 그들은 시대의 뒷골목을 누비며 권력과 세간의 명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문화예술계의 이면을 풍성하게 일구어냈다.
야마구치 시즈오카(靜岡)현립대 교수의 ‘패자의 정신사’(오정환 옮김·한길사 발행)는 패잔의 평화를 괴짜 취미와 놀이에 몰두하면서 즐긴 이 번벌 출신을 통해 일본 근대문화의 변화상을 조명한 책이다. 아와시마 진가쿠(淡島椿岳)·간게쓰(寒月) 부자가 대표하는 패자들의 다수는 그림, 음악, 글, 스포츠, 온갖 학문, 수집 등 풍류를 즐기며 고약한 놀이를 일삼기도 하는 등 평생 괴짜로 혹은 향락주의자로 삶을 즐겼다.
수없이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쌓아올린 취미세계의 면면에서 이들의 놀음이 현대 일본 문화로 맥을 이어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지 출판계를 호령하며 군림한 출판사 하쿠분칸(博文館)의 흥망, 자유대학운동과 괴짜들의 계보, 다이쇼(大正) 시절 화가들의 암투 등의 풍경은 지금 일본을 지배하는 문화의 밑그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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