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원전 번역의 중요성이야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안타깝게도 국내 학계는 서양 고전의 대부분을 아직도 중역(重譯)이나 편역(編譯)에 의지하는 형편이다. 지난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대회에서는 근대 이후 국내에서 나온 서양 고대철학 번역서 179종 가운데 중역본이 146종(81.5%)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사정이 더 나쁜 쪽은 서양 고대문학 번역이다.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소포클레스, 아폴로도로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등 그리스 로마의 이름난 시인 작가들의 작품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 대부분 중역이나 축약한 편역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특히 철학서와 달리 문학은 그리스 로마 신화 등 내용이 널리 알려진 작품이 적지 않아 제대로 된 원전 번역의 필요성이 더 절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국내에서 서양 문학 원전 번역의 목마름을 조금이나마 해갈하고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천병희(66) 단국대 명예교수 덕분이다.
1976년 문예출판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문고본으로 번역해 낸 이후 지금까지 30년. 그리스의 대표적인 서사시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연극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오이디푸스 왕’ 등은 물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등 고대 로마의 작품까지 그가 번역한 서양 고전은 모두 40종, 번역서 기준으로 15권을 헤아린다.
"대학시절부터 원전 번역이 필요하다고 늘 생각했지만, 누군가 했더라면 제가 직접 하지 않았을 겁니다. 자칫 잘못하면 엉터리 번역이기 십상이어서, 시작할 때는 실력이 있어서라기보다 만용을 부린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지금도 제 번역말고는 서양 고전 문학 원전 번역이 거의 없어 안타깝습니다."
독일 시인 횔덜린을 전공한 독문학 박사인 그는 학부시절부터 그리스어를 따로 공부할 정도로 서양 고전에 관심이 있었다.
원전 번역의 토대를 쌓은 건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유학시절이다. 거기서 북바덴 주정부가 시행하는 그리스어 검정시험과 라틴어 검정시험에 통과했고, 귀국 후 30대 중반부터 번역을 시작했다. 앞서 66년 귀국해 서울대 전임강사로 있다가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3년 옥살이를 하고, 10년 자격정지를 받아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다.
체계를 잡아 서양 고전문학 번역에 착수한 것은 94년 단국대출판부에서 그리스 원전 번역 시리즈를 내면서부터다. 10년 동안 ‘일리아스’ ‘오딧세이아’는 물론 아리스토파네스, 메난드로스의 희극,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크세노폰의 종군기 ‘아나바시스’, 이솝 우화 등 그리스 문학의 정수라고 할 작품을 줄줄이 우리말로 옮겨 냈다.
"그리스 라틴어 원전을 텍스트로 삼고 영어와 독일어 번역본을 참고로 봤다"는 그는 "원전 문장의 의미는 늘 한 가지"라며 "원전을 읽고 또 잘 됐다고 평가받는 다른 번역본을 참고해 그 한 가지 의미를 찾아내는 데 주력한다"고 말했다.
고전들은 서사시가 많기 때문에 문체를 살리기 위해 직역을 기본으로 했다. 그래서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그래야 고전 문체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게 지론이다.
지난해 정년퇴임 후 여유시간을 갖고 하루 6시간 남짓 번역작업에 몰두하는 그는 최근에는 로마 고전문학 번역에 집중하고 있다. 숲출판사에서 라틴문학의 금빛 나는 고전이라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나왔고, 오비디우스의 ‘로마의 축제일’이 한길사에서 나온다.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 ‘우정에 대하여’도 번역이 끝나는 대로 한 권으로 묶어 낼 계획이다.
글·사진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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