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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다시, 국가보안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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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다시, 국가보안법에 대하여

입력
2005.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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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폐지론이 언젠가부터 잦아들고 있다. 이 법을 없애면 세상이 당장 무너지기라도 할 듯 호들갑을 떨어온 수구정파와 언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개혁’ 완장을 두른 집권세력 안에서도 폐지 목소리를 듣기 어렵게 되었다. 야당의 드센 반발로 국회가 공전돼 개혁입법 전반이 좌초할 위기에 놓여있다는 것이 그 명분이다. 민주노동당에서도, 보안법 폐지에 온 힘을 쏟는 것은 민중의 삶의 질 개선이라는 진보정당의 일차적 의무를 결과적으로 방기하는 전술적 패착이라는 반성이 나온 지 오래다. 개혁 진영의 명망 있는 학자들도 이런 상황인식을 이론적으로 거들고 있다. 한 마디로 보안법 폐지론은 세련되지 못한 담론이라는 것이다.

이 세련되지 못한 담론을 다시 끄집어내고 싶다. 우선 열린우리당이 개혁법안들을 한 다발로 묶어 추진함으로써 반대파들을 응집시키는 전술적 오류를 범했다는 것은 보안법이 반드시 없애야 할 악법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변경시키지 못한다. 심지어 특정 시점에 보안법 존치를 바라는 여론이 높다는 사실도 이 법이 악법이라는 사실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보안법은 왜 악법인가? 이 법이 모든 자유의 바탕인 사상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옥죄면서 역사의 유물이 돼버린 냉전체제의 산소마스크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안법을 내버려두자는 논거의 두 축은 민생론과 사문화론이다. 수구정파와 언론에서 주창해 개혁정파 일부까지 감염시킨 민생론의 요점은 나라 경제가 어려운데 서민 살림살이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보안법 문제로 왜 나라를 들썩이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폐지론자들이 존치론자들에게 궁금해 하는 것도 바로 그 대목이다. 나라 경제가 어렵다는데 서민 살림살이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보안법을 왜 그리 부둥켜안고 애지중지하며 나라를 들썩이게 하느냐는 말이다. 이 민생론은 더러 샛길로 빠져, 보안법으로 불편한 사람은 소수일 뿐인데 그냥 놓아두면 좀 어떠냐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상검열법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보안법도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잠재의식을 억누른다. 더 나아가, 보안법으로 해를 입는 사람이 설령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소수자 보호는 자유주의의 핵심원칙 가운데 하나다.

주로 지금의 집권세력 한쪽에서 나오는 사문화론은, 보안법이 악법이기는 하지만 실제론 거의 작동하고 있지 않으니 굳이 이 법을 놓고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편의주의적 태도가 법치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면서 시민들의 법 경시 풍조를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 지적해 두자. 편의주의자들이 잊고 있거나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은, 한 순간 사문화한 듯 보이는 보안법이 정권담당자나 사법부의 변덕에 따라 언제든지 되살아나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처벌할 가능성이다. 악법의 적용을 삼가는 ‘좋은 정권’과 ‘좋은 검찰’과 ‘좋은 사법부’를 기대하고 악법을 놓아두자는 주장은 법의 지배를 포기하자는 것이다. 보안법의 특별법으로서 남북교류협력법을 내세우며 이런 사문화론을 거들려는 시도도 온당치 않다. 왜 똑같은 행위가 정부의 승인을 받으면 남북 교류협력행위가 돼 무사무탈하고, 정부가 변덕이 나 승인을 하지 않으면 반국가단체와 관련한 탈출 잠입, 회합 통신, 찬양 고무 따위의 무시무시한 범죄가 돼 가혹한 처벌을 받는가?

"사물은 극에 이르면 변하는 것이 정한 이치다. 바야흐로 이 때 백성들은 익숙한 풍속에 얽매여 마치 큰 변괴나 만난 듯이 여겼으며, 서원에 붙어사는 유생 무리들은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어 더욱 미쳐 날뛰며 소리치고 상소를 한다고 대궐 앞에 엎드려 있는 것이 줄줄이 이어졌다. 식자들은 이를 비웃었다." 흥선대원군에게 매우 비판적이었던 구한말 선비 매천 황현이 대원군의 서원 철폐를 지지하며 남긴 기록이다.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지금 풍경과 닮은 데가 있지 않은가?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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