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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태 칼럼] 대통령의 말과 ‘큰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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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태 칼럼] 대통령의 말과 ‘큰 게임’

입력
2005.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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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 주재 대사를 역임한 미국의 외교 원로 제임스 릴리는 최근 중국이 대만 문제에 강경 입장을 거듭 천명한 것을 "호언장담"이라고 평가했다. 호언장담은 원래 분수에 맞지 않는 말을 희떱게 지껄인다는 의미다. 그러나 릴리의 말 뜻은 그게 아니다. 중국인들은 현실보다 과장되게 말하는 습관이 있고, 대만 독립 기도에 무력사용을 경고하는 강경 발언은 미국을 상대한 전략적 ‘큰 게임’(Great Game)의 일부라는 것이다. 대만에 관한 중국의 우려를 가볍게 여길 건 아니지만, 외교 안보정책의 기조가 바뀐 것으로 오해하고 민감하게 대응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독도 문제와 관련해 외교전쟁도 각오한다고 선언한데 이어 ‘동북아 균형자’ 역할론으로 파문을 일으킨 것에 릴리의 논평이 생각났다. 대일 강경발언은 독도의 상징성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거친 ‘장바닥 외교’라고 경계하는 글을 썼지만, 미국을 향해 ‘동북아 균형자’론까지 꺼낸 데는 그만한 전략적 판단과 의지가 있을 것으로 보고 싶었다. 언뜻 호언장담으로 들리지만, 릴리가 말한 것과 같은 ‘큰 게임’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 보면, 노 대통령은 독도와 일본을 전면에 부각시켰지만 주목적은 중국처럼 미국과 전략적 게임을 하려는 것으로 읽힌다. 정부 관계자들은 일본과 미국에 대한 국민정서가 다른 탓에 이를테면 미국과 계급장 떼고 맞장 뜨는 발언이란 사실을 숨긴다. 그러나 "한국의 선택에 따라 동북아 세력판도가 바뀔 것"이란 말은, 좋든 싫든 유일한 전략적 동맹인 미국과 결별하거나 독자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다음 중국과 동맹할 것인지를 따지지 않더라도, 일찍이 없던 대미 자주 선언이다.

왜 이런 대담한 말을 했을까. 독도 발언에 환호하는 국민도 어리둥절하다. "한미일 남방 삼각동맹에 언제까지 갇혀 있을 수 없다"는 어설픈 설명이 나왔지만, 어지간한 전략지식과 상상력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의 행태가 괘씸하고 재무장 등 우경화를 미국이 부추긴다고 해서, 아예 미국과 결별한다는 것은 웬만한 반미주의자도 쉽게 상상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미국을 향해 이런 경고를 할만한 사정은 있다. 미국이 북핵 문제를 고리로 우리의 현실적 국익과 진로까지 좌우하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견제해야 할 절박한 필요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이 북핵 문제를 갈수록 어렵게 몰고 가는 것은 중국과의 ‘큰 게임’을 위해 일본을 거점으로 동아시아 주둔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전략이란 분석은 엉뚱한 게 아니다. 미국은 나아가 한반도 통일 과정과 방식을 통제하기 위해 북한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미국에 할말은 하겠다"고 운을 떼던 노 대통령은 미국과 일본이 북한의 핵물질 수출과 가짜 유골 송환 등 근거 모호한 주장까지 내세워 압박을 강화하고, 여기에 맞선 북한의 핵 보유 선언으로 6자 회담마저 파국에 이르자 스스로 ‘큰 게임’에 나선 것으로 볼 측면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이런 시도가 건곤일척의 승부이기보다는 애초 헛된 호언장담이거나, 결국 그렇게 귀결되는 것이다. 한미 동맹은 여전히 유일한 선택이고, 아직 자주적 역량은 없다는 보수적 시각이 그저 옳다는 것이 아니다. ‘큰 게임’은 힘 센 나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작은 나라가 절묘한 세력균형 외교로 국력을 넘어서는 국익을 도모한 사례는 많다. 다만 노 대통령의 승부수가 냉철한 전략적 판단과 견고한 의지에 서 나온 것이고, 절묘한 외교력으로 뒷받침될 것 인지가 의문인 것이다.

이런 회의는 무엇보다 일대 국가전략 변경을 논하는 한쪽에서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열리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독도를 둘러싼 애국적 열기를 틈타 국민 정서를 고양시키는 발언만 내놓고 실제 이렇다 할 자주적 선택을 실천하지 않을 경우, 맥없는 불평이거나 일과성 여론 몰이로 끝나기 십상이다.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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