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차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스포티지’는 지난달 5,212대가 판매된 반면 현대차 투싼은 2,825대밖에 팔리지 않았다. 똑 같은 엔진과 차체를 사용하는 데도 투싼이 이처럼 완패한 이유는 뭘까. 자동차 업계에선 투싼의 실패는 노조 이기주의와 노사 불신이 기업의 시장 대응력을 가로막아 결국 상품의 실패로 이어진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한다.
2003년11월. 현대차 노사는 5개월 앞으로 다가온 투싼 출시에 따른 인력 재배치 및 생산 차종 이관 등을 협의하기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회사측은 싼타페 생산 경험이 있는 울산 제2공장 이외에 당시 테라칸을 만들던 제5공장에서도 투싼을 생산할 것을 제안했다. 제2공장 만으론 물량 확보에 어려움이 예상된 반면 제5공장은 다소 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조는 이를 위한 인력 재배치는 노조의 힘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는 데다 고용 불안 등을 야기할 수 있다며 반대했다. 특히 제2공장 근로자들은 투싼을 제2공장에서만 생산하면 특근과 야근 등을 통해 한 해에 1,000만원 이상 더 벌 수 있다며 제5공장에서도 생산하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했다.
투싼은 결국 협상이 타결되지 않은 채 비정상적인 생산체제로 2004년 3월 출시됐다. 문제는 시장의 반응이 예상보다 폭발적이었다는 데 있었다. 투싼은 판매 첫날 4,166대의 계약을 올리는 등 출시 9일만에 계약고 1만대를 돌파했다. 당연히 생산량을 늘려야 했지만 노조는 투싼을 제5공장에서 추가 생산하는 것에 대해 여전히 제동을 걸었다. 물량이 크게 부족해 지면서 투싼은 계약 후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하는 극심한 출고 대기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소비자들의 계약 취소가 잇따랐고 판매량은 추락했다.
현대차가 제5공장에서도 정상적으로 투싼을 생산할 수 있도록 노조와 합의하는 데 성공한 것은 협상 시작 11개월만인 지난해 9월이었다. 그러나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하는 차’라는 시장의 인식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기아차의 스포티지가 지난해 8월 출시되면서 투싼은 거의 잊혀진 차가 돼 버렸다.
이러한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현대차에서는 인력 재배치와 생산 차종 이관 등이 단체협약 제34조에 따라 노사 합의 사항이다. 지금도 베르나와 클릭을 생산하는 울산 제1공장은 주·야간 모두 10시간씩 근무하고 특근까지 한다. 반면 포터, 스타렉스, 트라제 등을 만드는 제4공장에서는 주간 근무조가 없이 야간에만 일하고 특근은 단 한 차례도 없다. 그럼에도 인력재배치나 차종 이관 등은 꿈도 꾸기 힘든 실정이다. 특히 같은 현대차 생산직이라고 해도 어느 공장에서 일하느냐에 따라 실질 임금에선 최고 1,000만원 이상 차이가 나면서 최근에는 노·노 갈등 양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는 기아차도 마찬가지이다.
노조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인력 재배치 후 경기가 나빠지면 구조조정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산차종 이관 등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무엇보다 노사 신뢰 구축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시장에서 물량이 달리는 데도 기존 공장 근로자들 이익 때문에 다른 공장에선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은 세계 어느 자동차 회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라며 "노조 이기주의와 극단적 노사 대립이 기업이 시장의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것을 막고 나아가 한국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을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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