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21일 육군3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은 매우 주목할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 뿐만 아니라 동북아에서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균형자 역할을 해 나갈 것"이라고 한 대목이 그것이다. 노 대통령은 앞서 공사 졸업식에서도 ‘동북아 균형자’를 언급한 바 있으나, 당시에는 그 의미가 매우 모호했다.
그런데 이번 3사 졸업식 연설에서는 그 의미를 보다 명확히 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동북아의 세력판도는 변화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강대국들 간에 패권경쟁이 격화하고 있는 동북아에서, 어느 쪽에 일방적으로 가담하지 않고 자주적 선택을 통해 당당히 세력균형자의 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노 대통령의 이러한 언급은 우리 안보정책에서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노 대통령의 발언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동북아의 분쟁에 휘말려 들 수 있고, 한반도는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수도 있고, 그렇게 해서 통일은 물건너간 것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최근 한반도 주변 정세는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미일 동맹의 강화와 주한미군의 개편은 그 한 단면이다. 문제는 우리와 동맹관계에 있는 미국의 정책과 전략이 오히려 우리의 안보환경과 통일환경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전략 기조는 한마디로 ‘일본을 키워 중국에 대항’하는 것이다.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역사왜곡과 같은 일본의 급속한 우경화와 군사 대국화 조짐의 배경에는 미일 밀착과 미국의 지지가 도사리고 있다. 미국은 일본에게 평화헌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앞장서서 지원하고 있다. 동북아에서 미국의 존재가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방지하는 ‘소방수’와 ‘병마개’ 역할을 한다는 기존의 긍정적 평가는 더 이상 설득력을 잃게 된 상황이다.
또한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지역 기동군화와 한미동맹의 지역 동맹화도 우리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전략적 유연성’의 목표가 사실상 중국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자칫 중국과의 군사적 대결로 이어질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전략적 유연성’은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다. 상호방위조약이 규정하고 있는 ‘방어동맹’을 벗어나, ‘공격동맹’ 내지는 ‘패권동맹’으로의 변질을 의미한다.
이처럼 미국의 세계전략과 동북아정책은 동북아에 대해 대립과 편가르기를 강요하고, 그럼으로써 또다시 양극체제와 냉전질서를 가져오게 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동북아에 대립과 갈등의 질서가 지속된다면, 한반도 평화는 요원해지고 남북 분단은 더욱 고착화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동북아 질서가 다자화하고 균형화하며 협력적일 때만이 가능하다. 이는 결국 우리가 동북아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동맹체제가 우리의 안보를 오히려 위태롭게 하고 안보환경을 악화시킨다면, 그러한 동맹체제가 과연 필요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동맹정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현재의 안보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동맹체제가 아니라 동북아에 협력적인 다자안보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자주와 동맹 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에 대한 선택의 문제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전혀 걸어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 꼭 가야 할 길이라면, 주저 없이 가야 한다.
이철기 동국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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