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진단
전문가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3·23 대일 선언이 광복절까지 이어질 수많은 대일 이슈에 대해 원칙론을 밝혀 일본의 전향적 조치를 끌어내는데 목적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일 신독트린에 대한 일본의 반응이 오기도 전에 너무 성급히 강한 입장을 밝혔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종문 교수(한신대 일본학과)
3·17 대일 독트린과 이번 선언을 통해 대일 정책의 방향을 설정했다.
이번 선언은 앞으로 닥칠 수많은 난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선제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성의 표현이다. 적어도 과거사 문제에서만은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내달 초 일본의 교과서 검정에서 일본의 전향적 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한 전술도 함축된 듯하다. 특히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참배가 현실화할 경우 한일 관계가 상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도 반영돼 있다.
▦박광기 교수(대전대 정외과)
한일간 마찰은 예견돼 왔다. 탈냉전 후 다른 지역의 질서는 재정립됐는데 동북아에서만은 냉전구조가 유지됐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와 미일동맹 강화 속에서 새 구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우리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데 우리도 끌려갈 필요가 없다. 동등한 한일관계 재정립 차원에서 이번 선언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17일의 대일 신독트린은 새로운 한일관계를 정립하고자 하는 정부의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인데 이에 대해 일본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통령이 다시 나선 것은 일본에 대한 주의 환기로 볼 수 있다.
▦이원덕 교수(국민대 국제학부)
신독트린 발표 후 일본으로부터 당장 답이 나올 수는 없다. 일본이 영토문제에서 기존 입장을 180도 바꿔서 당장 포기한다고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외교에서는 여러 카드를 준비했다 상황에 따라 적절한 카드를 내놓아야 한다. 강경이냐 온건이냐가 아니라 외교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신중히 계산하고 고려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대통령의 발언은 성급한 측면이 있다. 동북아의 새 질서가 형성되는 현재 북한 문제가 핵심 이슈이고, 한·미·일 공조가 절실한 상황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일본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논의해야 하는 상황이다. 교과서는 향후 지켜봐야 하고 이후 채택률까지 보고 장기적으로 판단하는 게 필요했다. 독도는 조기에 승부가 날 문제가 아니며 장기적 과제로 둘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아쉽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정상원기자 ornot@hk.co.kr
■ 곤혹스런 외교부
외교통상부는 노무현 대통령의 3·23 대일 선언을 가이드라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매우 당혹해 했다. 외교부의 한 당국자는 "17일 대일 독트린이 구체적 정책을 담은 것이라면 이번 담화는 대일 정책에 대한 기본 인식을 밝힌 가이드라인으로 본다"고 나름대로 성격을 규정했다. 당국자들은 "노 대통령이 선언을 통해 향후 대일 대처가 용이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냉정히 대응할 것이라고 밝힌 대목에 주목한다"며 대통령의 언급을 이해하려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하지만 외교부 밑바닥 기류에서는 예기치 못했던 당혹스러움도 감지된다. 노 대통령이 직접 ‘일본 중앙정부’, ‘집권세력’,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민감한 사안을 구체적으로 거론함에 따라 상당한 파장도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3·17 대일 신독트린과 달리 이번 선언은 외교 최고 수장의 언급이어서, 외교 무대에서의 영향력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교부로서는 이번 선언이 향후 대일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하면서 일본측 반응을 주시하고 있다.
특히 외교부는 노대통령이 과거 정부가 대일 문제에 대해 자제하면서 오히려 사태가 악화했다는 인식을 밝힌 데 대해 상당히 긴장하고 있다. "정부가 나서지 않은 것이 일본의 방심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대통령의 인식은 외교부에 대한 불신으로도 해석되기 때문이다. 올 3·1절 노 대통령이 일본의 배상책임을 강도 높게 지적할 당시 외교부는 이를 사전에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후 대일 현안에서 외교부의 목소리가 먹히지 않고 있다는 여론이 있어왔다.
이영섭기자
■ 盧대통령‘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 <요약>요약>
국민 여러분의 분노를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답답함은 분노와 항의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결말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게 할 것입니다. 물론 감정적으로 강경대응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전략을 가지고 신중하게, 그러나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 가다가 유야무야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일본은 자위대 해외파병의 법적 근거를 마련해 놓고, 재군비 논의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통스런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미래를 불안하게 하는 일들입니다.
사과는 진정한 반성을 전제로 해야 하고 상응하는 실천이 따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는 이전에 일본 지도자들이 한 반성과 사과의 진실성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로 선포한 2월22일은 100년 전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로 편입한 바로 그 날입니다. 지난날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대한민국의 광복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교과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들이 지자체나 일부 몰지각한 국수주의자들의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집권세력과 중앙정부의 방조 아래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일본의 행위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정부는 일본에 해야 할 말이나 주장이 있어도 가급적 시민단체나 피해자의 몫으로 넘겨놓고 말을 아껴 왔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미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일본의 행동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정부가 나서지 않은 것이 일본의 방심을 불러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이제부터라도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것입니다. 우선 외교적으로 일본 정부에 단호하게 시정을 요구할 것입니다. 다음은 국제여론을 설득하는 일입니다. 일본이 보통의 국가를 넘어서 아시아와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국가가 되려면, 역사의 대의에 부합하게 처신하고 확고한 평화국가로서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 국민들을 설득하는 일입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이번에 반드시 뿌리를 뽑도록 하겠습니다.
몇 가지 당부를 드립니다. 첫째, 일부 국수주의자들의 침략적 의도를 결코 용납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일본 국민 전체를 불신하고 적대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냉정을 잃지 말고 차분하게 대응해 나가야 합니다. 셋째, 끈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대응해 나가야 합니다. 하루이틀에 끝날 싸움이 아닙니다. 지구전입니다. 넷째, 멀리 내다보고 전략적으로 대응해 나가야 합니다. 신중하게 판단하고 느리다 싶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저는 사필귀정이라는 말을 믿습니다. 저에게는 이 일을 올바르게 처리할 소신과 전략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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