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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7) 빌헬름 라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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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7) 빌헬름 라이히

입력
2005.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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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충무로에서 만들어지는 한국영화의 대부분이 바람난 유부녀들의 이야기로 채워진 적 있다. 동물이나 과일의 이름에 빗댄 ‘~ 부인’류의 영화들이 그것이다. 그 영화들에서 여자 주인공이 성적 일탈에 빠지는 건 남편의 성적 무능력 내지는 무관심 탓으로 그려졌다. 결론은 대부분 여자 주인공이 참회하며 가정으로 돌아온다는 식의 권선징악적 내용이었는데, 썩은 과일을 잘못 삼킨 것 같은 여배우들의 과장된 교태보다도 더 민망했던게 바로 엔딩 부분에 뜬금없이 교시되는 도덕적 훈계였다. 그 순간, 왠지 겸연쩍고 까닭 없이 우울한 공기가 떠돌던 어둡고 눅눅한 극장은 대한민국 성인들의 성의식을 지배하는 암울한 게토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단 몇 분이면 훨씬 질 좋고 테크닉 좋고 때깔도 좋은 포르노물을 받아볼 수 있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10여 전의 얘기다.

한국 에로영화의 역사를 개관하자는 게 아니다. 소위 ‘3S’ 정책 운운하며 그 시절의 정치적 억압을 환기하는 건 시효가 지난 고루한 변증법의 에누리일 뿐이다. 단지, 성적 억압에서 사회적 일탈로까지 이어지는 그 유구한 심리적 메커니즘의 구조를 직시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 메커니즘이라고는 했지만, 그 심리가 개인의 억압된 욕망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아울러 그 억압이 해체되었을 때 얻게 되는 해방감이나 자유가 특정한 개인의 심리적 보상차원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성적 욕망이란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사회·경제적 집단 전체의 룰을 환기하는 극단적인 본보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 서구정신의 일대 변혁기를 주도했던 두 명의 거장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삶의 내적 구조를 혁신하려 했던 프로이트와 사회의 체제를 변혁하려 했던 마르크스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연구되고 인용되는 이들은 그러나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잘못 읽히거나,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성전(聖典) 취급을 받는다. 개인과 사회라는 단선적인 이분법이 이 두 거장의 심연 사이에 놓여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빌헬름 라이히의 전기. 라이히의 제자이자 현재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 교수로 있는 마이런 섀라프가 쓴 780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평전이다. 저자는 스승인 동시에 친밀한 동지였던 라이히의 복잡다단한 일면들을 상세한 일화들과 자료들을 참조해 그려보이고 있다. 세상의 온갖 편견 속에서 외롭게 분투했던 라이히의 일생은 부제로 쓰인 ‘세상에 대한 분노’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라이히의 이론을 이해하는 방편과 그를 비판하는 방편이 균형감 있게 제시되어 있는데, 선택은 늘 그렇듯 독자의 몫이다.

그들에게 배어있는 모종의 엄숙주의와 교조성은 그들 사유의 시원이 그들이 애초에 혁파하려 했던 체제와 지식권력 내부의 이항대립체적인 성격규정에서부터 이루어진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체제와 기성관념 안에서 그것들을 허물기 위한 독자적인 이론개진을 시도했으나 여전히 규명되지 않거나 결론지어지지 않은 ‘불가능성에 대한 가능성’ 만 남겨둔 채, 후세의 이론가들에게 아직도 확인사살 당하고 있다.

‘불가능성에 대한 가능성’이란 소위 ‘무의식의 해방’과 ‘계급혁명’이라는 두 개의 테제를 끌어안는, 아직도 유효한 삶의 대안적 질서를 일컫는다. 그 무모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독하게 분투했던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의학자 빌헬름 라이히(1897~1957)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빈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하던 라이히가 프로이트로부터 학문적 인정을 받게 된 건 1925년에 쓴 ‘충동적 성격’이란 논문을 통해서 였다. 이후 정신과 의사로 개업한 그는 1930년대 초 공산당에 가입해 독자적인 ‘오르곤 이론’을 심화·발전시켰는데, 이 이론이 극단적으로 사회주의와 성욕을 일원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자 프로이트는 라이히와 결별하게 된다. 라이히에 따르면 계급 없는 사회란 정치적·경제적 해방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적·심리적 해방 없이 이루질 수 없다. 이러한 성 윤리는 당시의 지식사회와 시민주의의 도덕적 기반을 흔드는 위태로운 도발로 간주되었고, 라이히는 가히 전면적이다 싶을 정도의 오해와 따돌림 속에서 좌파와 우파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스탈린주의와 우익 파시즘 어느 편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핍박만 받던 라이히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더더욱 극단적인 성 에너지를 실험했다. 히피를 비롯한 몇몇의 추종세력이 존재하긴 했으나, 라이히는 SF소설 같은 데나 나오는 미친 과학자의 최후가 연상될 정도로 참혹한 고독 속에서 감옥에서 일생을 마쳤다. 라이히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담은 전기가 얼마 전 우리나라에 출간됐다.

라이히의 주요저서로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와 ‘성혁명’ 등을 들 수 있다. 두 권 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적은 있지만, 일부 좌파 사회연구가들의 학술교재로나 인용될 뿐, 다양한 형태의 저술들이 시기마다 버전업되는 스승 프로이트의 ‘인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더욱이 프로이트가 말년에 천착한 ‘죽음충동’이나 ‘승화’ 등에 대한 지극히 문학적인 분석만 횡행할 뿐, 정치 경제적인 관점에서 성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관점이 대한민국 내에서 전면화한 건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고작 일부 문학작품이나 영화에 대한 외설논쟁이 추문과 다를 바 없는 집단적 호도의 방식으로 가십거리가 될 뿐이다. 단순히 유교적 정서에 바탕을 둔 순결 이데올로기로 뭉개버리기엔 인간의 성 에너지는 너무도 본원적이고 집요한 기원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다른 에너지로 완전히 전이되거나 승화될 수 없는 엄밀한 물질성을 지니고 있다.

물질을 정신화하는 건 불가능할 뿐더러 옳지도 않다. 오히려 물질 자체를 해방함으로써 정신의 또 다른 영역을 발견하는 게 더 정당하고, 기만의 여지도 적다. 라이히가 인간의 성 에너지에 접근하는 방식은 오르가슴이라는 생체 에너지(동양에서 말하는 기(氣)와 흡사하다)에 대한 엄정한 과학적 분석과 실험에 기인한다. 라이히는 그가 직접 설비한 ‘오르고논’이라는 실험실에서 오르가슴이 인간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론적 타당성을 발견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실제로 인간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는데, 그가 정신병자에 패륜아 취급까지 받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한 세상의 몰이해에 반응하는 라이히의 심중은 감옥에 있던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살짝 엿볼 수 있다.

"복통을 앓지 말고, 잘 소화해내어야 해. 진리와 사실, 명예와 페어플레이와 같은 올바른 길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솔직하고 나쁜 자가 되지 말아라."

라이히는 그가 발견하고 깨달은 과학적 논증 속에서 성 에너지의 기원과 작용에 대한 전례 없는 전범을 남겼다. 마르쿠제나 에리히 프롬, 들뢰즈와 가타리 등이 주창하는 새로운 사상혁명에도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한 그의 이론은 인간의 성 에너지가 가지고 있는 실재적인 힘을 정확하게 직시한 데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라이히를 인용할 때면 흔히 모범답안처럼 제시되는 ‘성에 대한 억압이 파시즘을 낳았다’는 식의 간결한 요약은 재고가 절실하다. 그것이 부분적으로 사실이라 하더라도, 어떤 도식 안에 갇힌 이론은 그 자체로 정식화되어 다른 이해의 가능성들을 차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상가에 대한 다양한 측면들을 방기한 채 일방적으로 요약되어 ‘다량살포’되는 그 숱한 다이제스트 본들의 전면 철회를 부언 삼아 주장한다.

사실, 라이히에 대한 이야기가 전면에 나오긴 했지만, 희대의 미친 과학자에 대한 연민이나 일방적 애정을 드러내고자 하는 건 아니다. 관건은 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치 경제학적 체계에 대한 뿌리 깊은 반성과 숙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의 상품화문제가 성에 대한 그릇된 신비주의와 억압에 기인한다는 건 이제 공공연한 변증이다. 권력의 편재성과 관련된 성 문제 역시 이미 발표된 논문만 해도 공공 도서관의 서가 하나는 거뜬히 메울 정도이다. 그럼에도 성은 여전히 인간의 바닥에 고여 그 자체로 출구가 요원한 심리적 억압기제로 작용한다. 이건 성의 문제가 여전히 개인의 심리 차원에서 편협하게 운위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성은, 그것이 몸의 문제인 만큼, 몸과 몸들이 얽혀 있는 사회적 체계에 대한 끝없는 저항과 그로 인한 정치 경제적 시스템의 균열로까지 이어지지 않으면 결코 풀리지 않는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한 오이디푸스를 비극의 주인공이라 간주한다. 그것은 하나의 문학적 메타포인 동시에, 성에 대한 근원적 죄의식을 조장하는 총체적인 도덕의 이미지로 작용한다. 그런데 곰곰 따져보면 거기엔 인간의 미적 인식에 대한 다양한 측면들이 암시돼 있다.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눈을 찔러 방랑길에 나선 오이디푸스는 한 소녀를 만난다. 앞을 보지 못하는 늙은 오이디푸스는 노래를 불러 구걸을 하고 소녀가 그의 길을 안내한다. 흔히 남녀관계에서 길을 발견하는 건 남성이지만, 어둠 속을 서성이는 오이디푸스는 스스로가 자초한 암흑 속에서 생의 또 다른 빛을 찾아낸 것이다. 만인의 제도와 질서에서 벗어난 오이디푸스는 그가 이전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을 새로운 세상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그의 눈은 감겨있지만, 그의 입은 트여 그가 어둠 속에서 발견한 세상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의 곁엔 그의 몸을 대신하는 착한 소녀가 있다. 이게 비극인가? 오히려 그는 스스로의 참담한 현재를 단호히 거스른 희대의 영웅은 아닐까? 자신의 눈을 찔러 맞이하는 암흑 속의 빛. 암울한 변두리 극장에서 애꿎은 에너지를 소모하던 세상의 모든 오이디푸스들이여, 집단적 맹목과 망아에 갇힌 자신의 눈을 찔러라. 그리하여 몸 안에 갇힌 당신의 진짜 얼굴과 만나라.

시인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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