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수도분할법’의 국회통과에 항의해 박세일 의원이 한나라당 정책위원장과 국회의원직을 사퇴키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이 법이 충청도 표를 얻기 위한 악법이라는 비난에 대해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은 "충청권 표 없이 어떻게 집권하느냐"고 솔직히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찬성 의원들, 특히 여당 의원들은 그 때문이 아니라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국가백년대계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아마 진심일 것이다. 아니라면 자존심이 상해서 낯을 들고 다니기도 거북할 것이다.
세상사란 게 복잡해서 사람마다 이해관계와 생각이 다르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할 수 있고, 그러다 보니 어떤 잘못도 합리화할 핑계를 찾을 수 있고, 핑계가 생기면 그걸 명분으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진정 믿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원하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처음엔 고민도 하지만 일단 핑계가 생기면 오히려 확신에 차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 사람이다.
히틀러가 수백만명의 유대인과 집시 및 슬라브인들을 죽인 것도, 캄보디아의 폴포트와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그 많은 동족을 학살한 것도, 마오쩌둥이 선량한 티베트인을 수십만명 죽이면서 티베트을 강점한 것도, 이완용이 매국에 앞장 선 것도,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자행한 것도, 전두환이 수많은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것도, 김정일이 21세기 개명천지에서 폐쇄국가를 유지하며 북한 인민들을 아사지경으로 내모는 것도, 모두 인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숭고한 생각에서다. 역사의 죄인치고 확신범이 아닌 경우가 별로 없다. 사람의 머리란 정말 편리한 것이다.
정부정책에 항의해 국회의원을 사퇴하는 것은 건국이후 박세일 의원이 처음이라고 한다. 아담 스미스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인정을 받는 것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시를 당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지혜와 덕이 아니라 부와 권력으로 인정을 받으려 애쓴다"고 말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감투를 얻으려 애를 쓰고, 한번 쓴 감투는 벗지 않으려 발버둥을 친다.
그래선지 굴곡이 심한 우리 현대사에서 우리 국회의원들은 별 일을 다 당하면서도 누구도 의원직을 버리지 않고 계속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려 했다. 그러나 국가가 명백히 잘못된 길을 갈 때 책임있는 이라면 감투에 연연하지 않고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정확한 사실판단력과 올바른 윤리판단력을 합한 것이 이성이다. 진정한 지성인은 이런 이성을 갖고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이성적 판단을 핑계대지 않고 실천하는 사람일 것이다. 박 의원의 사퇴결단은 매우 드문 본보기다. 다른 이들의 눈 때문에, 여러 가지 염려되는 불이익 때문에 알면서도 자신의 이성적 판단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 아닌가.
수도권 표심을 다시 얻기 위해 여당의 김한길 수도권대책특위 위원장은 성남공항 이전, 당인리 발전소 이전, 서울시 새청사 건설, 과천 R&D단지 건설, 국제금융벨트 조성, 초고층 국제비지니스건물 건설 등의 방안을 연일 내놓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중책을 맡고 있는 여당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박세일 의원의 지적처럼 ‘수도분할법’은 헌법재판소 결정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국민의 불편과 고통, 행정 비효율, 서울의 국제경쟁력 저하라는 큰 희생을 초래할 것이다. 또 언제 닥칠지 모르는 통일이후를 고려치 않은 악법이다. 국민 다수가 반대하므로 국민 저항도 클 것이고 이로 인한 국론분열과 혼란, 국력 낭비도 상당할 것이다. 그래서 이 법은 제대로 실행되기 힘들 것이다. 법을 통과시킨 여야 모두 자충수를 둔 것 같다. 나라가 걱정이다.
이근식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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