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 본야스키요? 어휴, 이제 겨우 걸음마를 했을 뿐인데요 뭘."
격투기 데뷔 무대인 ‘K-1월드그랑프리 서울대회’에서 챔피언을 거머쥐며 기염을 토한 최홍만. 그는 "그저 첫걸음"이라며 격투기 최강자들과의 비교에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 걸음은 그의 38cm 왕발 만큼이나 거대했다. 본격적으로 격투기를 연습한 지 고작 한달 반 만에 대망의 우승을 차지하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이 19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K-1서울대회에서 챔피언에 오르며 화려한 격투기 무대 신고식을 치렀다. 이날 최홍만이 들고 나온 필살기는 왼손 훅. 최홍만은 8강 토너먼트 1회전에서 와카쇼요를 1라운드 시작 1분40초 만에 시원한 KO승을 거두며 격투기 데뷔 첫승을 챙겼다. 이어 준결승에서는 일본의 천하장사 ‘요코즈나’를 지낸 아케보노를 맞아 1라운드 42초 만에 TKO승했다. 최홍만은 특히 소나기 왼손 잽으로 아케보노의 중심을 무너뜨린 뒤 왼손 훅 결정타를 적중시키는 두뇌 플레이로 관중석을 꽉 채운 1만6,000여명의 팬들을 열광케 했다.
지난해 서울대회 챔피언 카오클라이 카엔노르싱(태국)과의 결승전에서도 최홍만의 격투사 기질은 빛났다. 최홍만은 큰 덩치(218㎝)로 디펜딩 챔피언의 공격을 무력화 시키는 한편 위협적인 무릎차기로 경기를 지배했다. 최홍만은 여러 번 무예타이의 고수인 카오클라이의 전광석화 같은 발차기를 민첩하게 피해 상대를 당황케 했다. 연장 심판 전원일치(3-0) 판정승.
최홍만의 놀라운 적응력은 실전 뿐만 아니라 쇼맨십에서도 나타났다. 최홍만은 2회전에서 아케보노를 이긴 다음부터 잔뜩 긴장된 얼굴을 폈다. 펄쩍펄쩍 뛰며 결승 진출의 기쁨을 만끽한 최홍만은 결승에서는 히죽히죽 웃는 여유까지 보였다. 카오클라이에게 "공격할 테면 공격하라"는 듯 가드를 내리는 대담한 쇼맨십까지 선보였다. 익살스런 테크노 춤과 덩치에 안 맞게 애교있는 몸짓으로 우승 세리머니를 한 최홍만은 관중들을 향해 "우승하느라 힘들었어요. 밥 사주세요"라고 넉살을 떨기도 했다. 최홍만은 "처음엔 너무 긴장해 와카쇼요를 눕힌 뒤에도 관중 얼굴이 하나도 안보였다"며 "아케보노를 너무 빨리 이겨 아쉬웠다"고 말했다.
‘격투기 신인’ 최홍만의 갈 길은 아직 멀다. 연습 기간에 비하면 펀치와 수비 등은 일단 합격점이지만 킥과 스피드 보완이 급선무라는 지적이다. 이날 단발성 이벤트 경기인 ‘슈퍼 파이트’에 출전한 레미 본야스키와 피터 아츠는 "체격은 나무랄 데 없지만 대성하기 위해선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9월 ‘K-1월드그랑프리2005’개막전 출전 자격을 얻은 최홍만은 "이제 킥을 더욱 연마할 계획이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환기자 kevin@hk.co.kr
■ 차경만 前감독 보자 와락 안고 눈물
‘홍만아!’ ‘감독님!’ 소속 씨름단의 해체로 다른 길을 가야 했던 최홍만과 LG투자증권 씨름단의 차경만 전 감독. 데뷔전인 K-1 서울대회에서 최홍만이 우승이 확정된 뒤 두 사람은 링 밖에서 부둥켜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난해 12월 전격적으로 K-1 진출을 선언했을 때 씨름판을 등지는 제자에 대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차 전감독과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겠다"며 매정하게 스승을 떠났던 최홍만이 하염없이 쏟아내는 눈물 속에는 그간의 섭섭함과 미안함이 녹아 들었다.
이날 한시간 전부터 남몰래 경기장에 도착해 제자의 출전을 기다렸던 차 전 감독은 "홍만이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일부러 전화도 안 했다"고 말했다. 스승은 스승이다. 차 전 감독은 혈육 같은 제자 최홍만이 정글 같은 격투기 무대에서 매만 맞고 좌절할까 봐 걱정이었다. 매 경기마다 가슴을 졸이며 연신 엉덩이를 들썩여야 했던 차 전 감독은 최홍만이 우승을 차지한 뒤에야 마음이 놓이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생각보다 잘하니까 기분 좋다"는 차 전 감독은 "천하장사도 일년 만에 된 최홍만이다. 체력을 키우고 하체도 더 단련하면 훨씬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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