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불현듯 "자신도 알아채지 못하고 또 이해할 수도 없는", 그래서 설명할 수도 없는, 비일상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정서를 경험하게 된다. 가령, 느닷없이 공포감이 엄습한다든지 모호한 대상을 향한 분노와 적의에 치를 떠는 경우가 그렇다. 그 이면에 도사린 의미 혹은 자신을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불변의 상수(常數)’를 오롯이 파악하기란, 떼돈을 들여 정신분석을 받는다 하더라도,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해서, 인간은 의식하든 않든, ‘나인가, 혹은 내가 아닌가’(p.25)를 자문하는 존재다.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 ‘청산’의 주인공 케세뤼처럼.
따지고 보면, 세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의 결과가 항상 원인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며 "원인들도 확실한 근거를 가진 사건의 출발점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과의 분석을 넘어 원인까지도 조작하려고 설쳐대는 이 세상의 논리학은 왜곡된 논리다."(p.65) 하니, 그냥 대충 팔자려니 해버리는 게 속 편한 삶의 방편인데, 거기다 대고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고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고 후벼 파게 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케르테스의 데뷔작 ‘운명’의 주인공처럼.
‘청산’은 출판인 케세뤼가 9년 전 자살한 작가 ‘B’의 유작(遺作) 장편소설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B는 1944년 학살이 제도적으로 찬양되던 ‘아우슈비츠’에서, 실수처럼 기적처럼 태어난 작가다. 그는 ‘나인가, 혹은 내가 아닌가’의 물음의 근원에 아우슈비츠를 품고 산다. 그에게 아우슈비츠는 허벅지에 새겨진 죄수번호 낙인처럼, 삶 자체다. "삶이란 단 하나밖에 없는 수용소/ 인간을 위하여/ 신에 의해서 지상에 세워진 것"(p.93)이다. 그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배운 것은 "반역은 곧/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고, "유일한, 기품 있는 자살의 수단은 바로 삶"이다. "아우슈비츠의 존재를 허락한 이 세상에 아이를 내던지기(출산)를 거부"해 아내와 이혼한 그다.
케세뤼가 B와 B의 유작에 집착하는 까닭도 ‘나인가, 아닌가’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영혼 역시 양차대전의 참화와 이데올로기의 억압으로, 황폐한 상태. "아마도 그 책을 읽으면 B가 왜 죽었는지, 또 그가 죽어버린 이 현실에서, 나는 아직 살아 있을 이유가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p.70)
B의 삶과 죽음의 내막들은 그의 작품이 아닌, 전처와 내연녀의 진술을 통해 어렴풋이 드러난다. "그는 항상 말했죠. 인간의 진실한 표현 수단은 바로 그의 삶 자체라고요. 치욕적인 삶을 견뎌내며 침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성과라고 했어요."(p.163)
B는 자신의 삶에 각인된 불변의 상수 ‘아우슈비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거기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까지 치닫는, ‘청산’의 방식을 택한다. 그 골목 끝 육중한 벽 앞에서 B가 찾은 ‘나인가, 아닌가’의 해답은 그러나 소설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이, 애당초 그렇게 "초월적 기호문자처럼 매혹적이고 이해할 수 없"도록 생겨먹은 탓이고, 다만 우리는 "주어진 세계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나름의 ‘아우슈비츠’를 품은 채 ‘인정하고 적응하며’ 아프게 살아가는,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재의 우리 삶이 아닐까.
2002년 노벨상을 탄, 유대 혈통의 케르테스는 그 자신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체험을 토대로 작품을 써왔고, 장편 ‘운명’과 ‘좌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로 국내에도 적지않은 팬을 확보한 작가다. ‘청산’이라는 이 역설적 제목의 소설로 그는 기왕의 ‘운명3부작’을 ‘4부작’으로 완결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홀로코스트에 관한 소설은 그만 쓰겠다"고, "앞으로는 이후 세대의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소설의 끝 장면, 케세뤼의 모니터가 다급하고 집요하게 묻는 질문의 해답만은 분명해 보인다. "계속할까요?" "중단할까요?"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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