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숨 걸고 제 돈 내서 독도를 지킨 사람들을 제대로 대우도 해주지 않으니 이래 가지고 무슨 반일을 하겠어." 아무도 독도를 지키려 하지 않을 때 스스로 나서 일본 침탈을 막아낸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1986년 작고·당시 54세) 대장의 부인 박영희(70·경기 구리시)씨는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다케시마(竹島)의 날’을 제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에 분노하기보다는 조국에 대한 실망으로 눈가를 적셨다. 남편은 유언에서마저 가족들의 생계보다는 "대원들이 국가유공자가 되도록 애써 달라"고 할 정도로 국가와 독도, 그리고 대원들만 생각했지만 굴곡의 현대사를 거치며 빨갱이로 몰린 남편 때문에 가족과 대원들이 입은 피해가 오히려 컸다.
홍 대장 등 33명의 민간인 수비대는 54년부터 거친 자연환경과 식수 부족 속에서도 독도를 지켜 내고 56년 경찰에 임무를 인계했다. 이후에도 홍 대장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독도에 주민을 상주시키자" "나무를 심고 독도를 개발하자" 등 일본이 독도를 넘보지 않게 하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하지만 이 제안은 번번이 거절 당했다. 특히 박정희 정권 때는 북한 대남 방송에 홍 대장 이야기가 소개됐다는 이유만으로 관계 당국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후 국가유공자 지정은커녕 좌익분자로 몰려 고초를 당했다.
"큰 딸이 간호대를 나와 보훈병원에 취직했는데 승진이 안 되는 거야. 국가보훈처에 아는 사람을 통해 알아봤더니 아버지 때문이라더군. 승진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거야." 결국 딸은 86년 사우디아라비아 간호사 파견을 거쳐 미국에 자리를 잡았다. 둘째 딸도 영어 교사 자격증이 있었지만 공립학교 취직을 포기하고 사립학교에서 가르치다 그마저 얼마 안돼 그만둬야 했다. 언니 2명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셋째 딸은 아예 대학도 포기하고 장사에 나섰다. 자녀 가운데 사진 작가인 막내 아들만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홍씨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 결국 척추암을 얻어 세상을 떴다. 홍씨가 죽은 뒤 10년 뒤인 96년 보훈처는 유족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홍씨에게 보국훈장 3·1장을 추서하고 다른 대원들에게도 보국훈장 광복장을 추서하거나 수여했다. 남편 유언은 일부나마 이뤄줬지만 변한 것은 없다. 서훈의 격이 낮아 대원이나 그 유족들 누구도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원들에 대한 의료혜택도 전혀 없다. 박씨는 "수비대 분들 중 살아 계신 12명 대부분 80대 노인이지만 병원비가 없어 전전긍긍하는 것을 보면 답답하다"며 안타까워 했다.
박씨는 일본의 계속되는 독도 침탈 야욕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일본을 막아내려면 우리부터 굳게 뭉쳐야 해. 그런데 국토를 지키자고 맨몸으로 일어선 자기 국민도 못 보살피는데 어떻게 국민이 뭉쳐지겠어."
◆ 독도의용수비대는 =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4월 독도 근해에서 조업하던 울릉도 어민들이 일본 순시선의 조업방해 등 만행에 견디지 못해 결성됐다. 3대째 울릉도를 지켜 오던 홍순칠 대장이 전답을 팔아 총과 박격포 등 무기를 구입했고 전투경험이 있는 상이군인과 울릉도 거주 민간인 32명이 합류했다. 수비대는 약 1년간의 준비 후 독도에 입도해 54년 6월28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독도에 무단 상륙한 일본인을 몰아내고 ‘일본령(日本領)’이라고 쓰인 표지 대신 ‘한국령(韓國領)’이라는 표지를 붙였다. 이듬해 8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오키호와의 총격전, 11월 일본 군함 3척에 대한 포격전 등 56년 12월25일 경찰에 독도방위 임무를 넘기기까지 목숨을 걸고 ‘독도 지킴이’ 역할을 수행했다.
신기해기자 shink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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