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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봄 열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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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봄 열차여행

입력
2005.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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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을 배웅하기 위해 오랜만에 청량리역을 찾았다. 거의 20년만인 것 같다. 주말에 서울 나들이를 오셨던 부모님은 열차를 타고 귀향하겠다고 하셨다. 시간도 더 걸리고 연계 교통도 불편하다고 버스를 권했지만 고집을 피우셨다. 과거 서울생활을 하면서 열차를 자주 이용하셨던 아버님은 개찰구를 빠져나가시면서 이유를 말씀하셨다. "옛날 생각에 좀 잠겨 보려고."

고향이 동해안이다. 이제는 제법 규모가 큰 도시가 됐지만 과거에는 말 그대로 '깡촌'이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학교에 다녔다. 심하게 향수병을 앓던 촌놈은 청량리역을 자주 이용했다.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이었고 국도가 동해안까지 나 있었다. 청평 횡성을 거쳐 대관령을 넘는 길이다. 말이 좋아 국도지 강원도 산골로 연결된 이 도로를 지나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서울을 빠져나가자마자 비포장이 시작됐다. 청평을 지날 때 쯤이면 엉덩이가 얼얼했다. 운이 좋지 않아 뒷좌석에 앉으면 진동이 심할 때 튀어 올라 머리를 다치기도 했다. 버스의 엉성한 창문을 뚫고 들어온 겨울의 칼바람에 콧김이 얼어붙었다. 지금은 도로가 좋아서 서울에서 3시간만 달리면 바다를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13시간도 모자랐다. 진이 다 빠졌다.

자연스럽게 열차를 선호했다. 버스보다 안락했고 통행금지가 있던 당시에 밤시간을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방학식이 끝나면 청량리역으로 달려가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먼동이 틀 때면 고향에 도착했고 바로 신나는 방학이 시작됐다. 개학 전날까지 고향에서 버티다가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바로 학교에 직행을 하곤 했다.

열차를 자주, 오래 탔던 것이 이유였을까. 방랑병이라는 '죽어야 낳는 병'에 걸렸다. 학창 시절에도 틈만 나면 보따리를 싸더니 직장에서도 돌아다니는 종목(여행지를 취재하는 기자)을 수년간 담당했다. 병이 업이 된 셈이다. 주로 승용차를 이용했다. 들고 다니는 짐도 많고 취재 현장에서 기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주일이면 2~3일을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고 보냈다. 대한민국의 유명 여행지라면 거의 찾아봤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취재 기록으로는 많은 것이 남아 있지만 아련하게 마음을 울리는 추억이 없다. 돌이켜 보면, 아직도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여행의 기억은 대부분 승용차가 아닌 열차 여행이었다. 차의 규칙적인 덜컹거림, 코를 싸하게 하는 디젤 냄새, 빨간 그물 주머니에 담긴 삶은 달걀, 홍익회 아저씨의 묘한 억양 "김밥 있어요. 김밥", 그리고 차창 밖의 풍경…. 여행의 추억은 이렇게 오감에 남아있어야 한다. 운전대를 잡은 채 과속 카메라에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여행으로는 불가능하다.

한 때 고향 가는 열차를 기다리며 가슴이 부풀곤 했던 청량리역 광장에 한참 서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 여행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혼자 빙긋빙긋 웃었다. 사람들의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병이 다시 도지려는 것을 애써 참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님이다. 열차는 이미 서울을 벗어났고 두 분은 벌써 맥주 한 잔까지 하셨단다.

지난 겨울 유난한 폭설을 경험했던 어머님은 바깥 풍경이 좋으셨나 보다. 마지막 말씀이 인내의 한계를 무너뜨렸다. "이제 완전히 봄이다. 봄. 우리 지금 봄 데이트 중이다."

완전히 병이 도졌다. 이번 주말에는 세상 없어도 열차를 타야겠다. 섬진강의 매화가 활짝 피었다는데.

권오현 생활부장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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