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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태 칼럼]‘공짜 점심’과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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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태 칼럼]‘공짜 점심’과 박근혜

입력
2005.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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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점심은 없다" (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약소한 점심 한끼의 호의도 뭔가 갚아야 할 부담이 따른다는 뜻으로 더러 쓴다. 경제학자들은 이 말을 공짜 점심을 즐기는 데 투자하는 시간만큼 다른 일을 할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는 식으로 냉엄한 경제논리를 설명하는 데 자주 쓴다. ‘TSTFL’이라는 약어까지 있다.

이렇게 모든 걸 이익과 비용의 관계로 따지는 경제학자들은 대개 사회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다. 토마스 카알라일이 경제학은 ‘음울한 학문’(the dismal science)이라 부른 것도 이런 맥락이다. 성장 정책은 경제학자의 소관이지만 분배는 도덕과 정치의 영역이라는 규정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듯 하다.

경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미국에 간다는 소식에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공짜 점심’ 발언이 생각났다. 이 총재는 대권 도전을 앞두고 미국을 방문해 "더 이상 북한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선언, DJ 정부의 햇볕정책과 분명한 차별화를 다짐했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의 관례를 넘어선 환대에 한껏 고무된 모습으로 귀국했다. 부시 정부 초기 백악관을 찾은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 포용정책과 관련해 홀대와 면박을 당하고 돌아온 것과 대조적이었다.

이 총재의 공짜 점심 발언은 대북 퍼주기를 줄곧 비판한 야당의 정책노선과 일관된 것이다. 따라서 햇볕정책에 제동을 거는 미국 정부에 적극 동조하는 입장을 그들에게 친숙한 표현으로 전해 좋은 반응을 얻은 것에 기꺼워할 만 했다. 그러나 언뜻 절묘한 공짜 점심 발언이 대권 도전에 도움됐을지는 의문이다. 오래 전 판가름 난 대선 결과로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의식과 정서에 어떻게 비쳤을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나는 이 총재의 발언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가 우리 정치인으로서 드물게 훌륭한 자산과 인품을 지녔지만, 남북과 지역과 이념과 계층을 경계로 갈갈이 찢긴 나라를 이끌 지도자의 경륜과 비전은 갖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한층 절실하게 느꼈다. 그 자신과 그런 표현을 궁리한 측근들은 햇볕정책과 대북 퍼주기에 불안과 반감을 갖는 이들과 미국을 함께 만족시킨 것을 스스로 대견하게 여겼을 법하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를 가림 없이 북한과 미국에 대한 오랜 애증(愛憎)의 인식이 흔들려 혼란스런 사회 전체에는 감동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민족과 자주를 외치는 변화 요구가 거센 사회 저변의 기류는 외면한 채 전통의 보수와 친미에 안주하는 편협함이 두드러졌을 뿐이다.

남북문제에 ‘공짜 점심’ 표현을 쓴 것은 ‘대북 퍼주기’ 표현이나, 남북문제는 철저히 비즈니스로 다뤄야 한다는 보수언론의 주장보다 천박했다. 민족문제를 마치 노숙자 무료급식을 시비하듯 다루는 인상마저 남겨 강파른 이미지를 더했다고 본다. 이 총재가 실패한 주요 요인일 것이다.

북핵 등 북한문제에 대한 보수적 접근은 여전히 올바른 국가전략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시 정부의 강경책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안겼는지 제대로 봐야 한다. 사태 악화를 북한의 무모함에 노무현 정부의 대미 자주노선이 가세한 탓으로 보는 건 엉뚱하다. 노 대통령은 대체로 미국의 대북정책에 영합하는 자세를 취했다. 여기에 비춰 지금 보이는 갈등은 다분히 위선적이다. 노 대통령도 미국과 북한 문제를 다루는 데 실패하고 있다.

북핵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미국을 찾는 박 대표가 대북 포용 자세를 내보일지는 그가 선택할 문제다. 다만 우리 사회는 냉엄한 경제논리에 쉽게 기울지만, 남북문제에는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민족적 정서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게 자신의 정치적 장래를 위하는 길이고, 혼돈을 헤치고 나라를 이끌겠다는 정치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비전이라고 믿는다.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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