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 선생의 유족들이 애국가의 저작권을 한국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힘에 따라 이제 우리 정부와 국민들의 성의 있는 보상이 숙제로 남았다. 문화관광부는 지난 달 애국가의 저작권을 사들일 것을 행정자치부에 요청했지만, 유족들은 돈보다는 국가유공자 지정, 기념관 건립 등 예술가로서 선생에 대한 예우를 더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올해는 안익태 선생 40주기, 내년은 탄생 100주년이다. 앞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을 점검한다.
◆ 국가 유공자 지정
안익태기념재단은 1982년과 지난해 두차례에 걸쳐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해줄 것을 국가보훈처에 신청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관련 선생의 활동상을 입증할 충분한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지정이 보류됐다. 보류 결정은 안익태기념재단과 국가보훈처가 합동으로 증거를 더 확보해보자는 취지였다. 지금까지 계속 증거 수집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해 유족들의 바람대로 독립유공자 지정이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애국가를 작곡한 공훈에 대해서는 1965년 정부가 이미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 유품 구입 문제
안익태 선생의 유품 중 90여 점은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와있다. 롤리타 안 여사가 기증한 것들로, 선생이 연주하던 첼로와 쓰던 지휘봉, 친필악보 등 일부가 독립기념관 제6전시실에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178 점은 아직도 스페인의 유족들이 갖고 있다. 2003년 외교통상부가 이들 유품을 5만 달러에 구입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유족들이 거절했다. 돈 액수보다 독립기념관에 유품을 무상으로 기증한 뒤, 국가 차원에서 아무런 성의 표시도 없었던 점이 서운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차원의 협상이 결렬되자, 지난해에는 안익태기념재단이 나섰다. 50만 달러에 유품을 구입할 테니 ‘애국가 저작권’을 넘겨달라고 제안했으나, 유족들은 노 코멘트였다. 올들어 애국가 저작권 논란이 일면서 재단은 최근 이사회에서 유품을 재단기금 50만 달러에 구입할 것을 결정했다. 재단 관계자는 "이 액수는 단순한 돈이 아니라, 선생과 유족에 대한 예우 내지 보상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 안익태 기념관 건립 문제
지금까지 정부도 민간에서도 구체적으로 추진된 바 없다. 스페인 마요르카 섬에 있는, 선생이 마지막 20여 년을 보냈고 현재 유족이 살고 있는 집은 현지 동포 실업인이 사들여 기념관으로 꾸며달라며 1991년 외교통상부에 기증했다.
그러나 정부는 2002년 이 집이 진작부터 국가재산이 된 줄도 모르고 사들여서 기념관으로 만들겠다고 해 빈축을 샀다. 그 뒤 정부 차원에서 이 집을 기념관으로 운영하는 계획은 이를 관리할 법적 근거가 없고, 실용성에도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현재 이 집은 많이 낡았다. 안익태기념재단은 이 집의 유지비와 유족 생계비로 매달 2,500 달러를 보내고 있다.
스페인이 아닌 국내에 기념관을 짓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안익태기념재단의 숙원이었다. 그러나 서울시가 땅을 내주고 정부가 돈을 대어 지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이었을 뿐, 구체적으로 검토나 협의가 된 건 없었다.
◆ 저작권 문제
애국가도 돈 내고 불러야 하느냐는 일부 네티즌의 반발이 거세지만, 애국가의 저작권도 존중돼야 한다는 게 음악인들의 중론이다. 애국가는 처음부터 우리나라 국가로 작곡된 게 아니라, 관현악작품 ‘한국환상곡’의 일부로 작곡된 것이고 이 노래가 해방 후 오랜 세월 불리면서 자연스럽게 국가로 자리잡은 것이다.
다행히 유족들이 무상으로 기증하겠다고는 했지만, 한 나라의 국가(國歌) 저작권 문제와 관련, 캐나다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캐나다 정부는 1970년 캐나다 국가인 ‘오, 캐나다’의 저작권을 작곡가의 유족으로부터 사들였다. 그러나 음악 창작물의 저작권이 작곡가 사후 50년까지 인정되고 있기 때문에 신생 국가가 아닌 이상 한 나라 국가의 저작권이 문제가 되는 예는 거의 없다.
◆ 기타 기념사업
현재 안익태 기념사업은 안익태기념재단이 하고 있다. 재단은 1992년 한국일보가 주도한 국민모금 운동으로 모아진 8억원으로 출발했으며, 그동안 유족의 생계비와 스페인 현지 유가(遺家) 보존비를 지원하는 한편, 한국일보와 공동으로 안익태 작곡상을 운영해왔다.
재단 출범 당시 선생의 부인 롤리타 여사는 생계가 곤란한 처지였다. 여사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로도 24년 동안 한국 국적을 유지했으나, 그로 인해 스페인 정부의 연금을 받지 못해 집세도 못 낼 처지가 되자 1989년 스페인 국적을 다시 취득했다. 이런 사정이 알려지면서 1991년 현지 동포 실업인이 경매로 넘어갈 뻔한 그 집을 사들여 우리정부에 기증하고 유족이 살게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김정곤기자 kim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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