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클라이튼의 베스트셀러 소설 ‘떠오르는 태양’이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자 미국인들은 일본의 경제 사무라이를 비판한 이야기가 일본인을 자극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된 건 일본 사회에서 천민계층을 지칭하는 ‘부라쿠민(部落民)’이라는 단어였다. 100년 전에 공식 폐지된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엄존하는 일본에서 이 단어는 금지어였다.
■ 영국 하원에서는 국회 품위유지를 위해 다른 의원을 바보, 악당, 위선자, 반역자, 강아지, 돼지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관례화돼 있다. 금지어를 쓸 경우 의장은 즉시 취소와 사과, 퇴장명령을 내린다. 중국 쓰촨성 충칭시교육청은 2003년 ‘교사가 해서는 안 될 말 10가지’를 선정했다. 쓸모없는 인간, 너를 구할 약은 없다, 너 같은 학생은 어디에도 없다, 네 장래가 뻔하다 등 비교육적 언사들을 금지어로 공식 채택한 것이다.
■ 여론 형성의 장인 인터넷에도 검색을 차단하는 금지어가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 버클리대학 연구팀은 지난해 중국에서 인터넷 검색이 안 되는 단어 및 문구가 1,000개가 넘는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민주주의, 기독교, 파룬궁, 폭동, 대만 독립, 톈안먼, 티베트 해방, 정부 전복, 인권, 다당제 등 대부분 정치적으로 민감한 것들이다.
■ 우리나라는 청소년에 유해한 용어 718개를 이른바 ‘금칙어’로 정해 놓고 있다. 욕설 따위가 대부분이지만 일상 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것들이 적지 않아 논란을 빚는다. 예를 들면 미아리, 미시, 밤꽃, 변태, 엽기, 조개, 젖, 귀두, 성폭력, 콘돔, 싸이코, HOT 등이다. ‘미아리’ 지역정보를 검색하고 과거 인기그룹 ‘HOT’를 검색하려면 성인인증을 거쳐야 한다니 황당하다.
■ 정부는 한술 더 떠 인터넷 심부름센터 불법행위가 극성을 부리자 킬러, 대포, 한탕 등 41개를 금칙어로 추가 지정토록 했다. 이제 ‘킬러들의 수다’라는 영화를 좋아하는 네티즌들은 동호회도 만들지 못하게 생겼다. 며칠 전에는 학교 폭력조직 일진회가 사회문제화 되자 일진, 일진회, 일찐, 노예팅 등을 금칙어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금칙어가 늘어나다 보면 나중에는 인터넷 검색기능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을까. 금칙어가 많을수록 정상적인 사회는 아니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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