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형을 만난 것은 30여 년 전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란 나는 못 먹고 못 배운 한을 풀어보겠다며 일찍이 전북 남원 고향을 떠나 상경했다. 그러나 서울은 냉혹했다. 갈 곳 없는 나는 구두통도 메어보고 식당에서 물지게도 지며 눈물도 참 많이 흘렸다. 그러다 서울 보문동의 한 이발소에 취직하게 됐다.
오직 기술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손님들의 머리를 감겨주며 청소를 했다. 밤늦게 일이 끝나면 혼자 이발소 의자에서 잠을 잤고, 새벽이면 난로불에 밥을 지어 간장 하나 놓고 먹어야 했다. 혹 그 시간에 손님이라도 오면 굶기가 일쑤였다. 그 때 함께 일하던 이발사 형이 나를 안쓰럽게 여겨 친형제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부모 형제와 함께 사는 형은 저녁에 일이 끝나면 자기 집에 데리고 가 밥도 먹이고 잠도 재워주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형은 마침 연애하던 중이어서 미처 내게까지 그렇게 마음 쓸 겨를이 없었을 텐데도 애인을 만나러 갈 때면 자주 나도 데리고 갔다. 지금은 아마도 형수님이 돼있을 그 예쁜 애인 분도 마음이 고와서 자기의 단칸 자취방도 마다 않고 누님처럼 대해 주었다. 형은 틈나는 대로 내게 드라이 방법 등을 가르쳐주었고 나중에는 가위질도 주인 몰래 배우게 해 주었다. 그리고 월급을 타면 아래층 빵집에 데려가기도 하고, 쉬는 날은 뚝섬에 가서 배를 태워주기도 했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끈끈한 사랑을 내게 주었던 것이다.
그런 형과 병역 문제 때문에 내가 귀향하면서 헤어지게 됐다. 하지만 고향에 가서도 형을 잊을 수가 없었다. 편지 왕래를 하던 중에 한번은 형이 이발소에서 휴가를 내 불원천리하고 내 고향까지 찾아와 주었다. 그 때 재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마을 분들은 "서울 기술자에게 머리를 깎겠다"며 서로 형에게 매달렸고, 나는 형을 "서울에서도 아주 일류로 꼽히는 내 사부님"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광한루와 금암봉을 구경하며 사진도 찍고, 요천수 많은 물에서 물고기도 잡으며 형제보다도 더 끈끈한 정을 나누었다. 어려울 때 입은 은혜는 죽을 때까지도 잊을 수 없는가 보다. 형은 내게 아낌없이 베푸는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30여 년 전 서울 보문동 이발소에서 만난 이윤형 형님! 지금은 어디에서 사시는지. 꼭 만나고 싶습니다.
유환택·경기 광명시 철산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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