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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5) 노래가 아닌, 추억을 파는 상점 '콘서트 7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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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5) 노래가 아닌, 추억을 파는 상점 '콘서트 7080'

입력
2005.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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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한다는 20대 초반의 친구에게서 레드 제플린이나 지미 헨드릭스를 제대로 들어본 적 없다는 얘길 듣고 황당했던 적이 있다. 내게 그건 김수영이나 이상을 읽지 않고 시를 쓰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때문에 그 친구에게 지미 헨드릭스의 음반을 들려주며 '고전의 가치와 깊이'에 대해 한참 '썰'을 풀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대놓고 ‘구리다’는 게 그 친구의 입장이었다. 라디오헤드나 오아시스 등 90년대 이후 록음악 마니아인 그 친구에게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소리는 꼰대들의 설교로 들렸던 것 같다. 그 순간 나는 열 살도 차이 나지 않는 그 친구에게 ‘꼰대들의 대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창졸간에 꼰대가 되어버린 나는 그러나 애써 젊은 티를 내려 하지 않는 것으로 그 친구와의 미묘한 갈등을 무마시켜 버렸다. ‘나중에 귀가 열리면 그들의 참 맛을 알게 될 거다’라는 등의 갈무리였는데, 수개월 후 다시 만났을 때 그 친구가 먼저 지미 헨드릭스 얘기를 꺼냈다. 어느 순간 ‘필’이 잡히자 그 사운드가 굉장히 친숙하면서도 고차원적으로 들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60년대 싸이키델릭 사운드까지 소급해서 듣게 된다고도 했다. 그 무렵 나는 음악적 취향이 줄기차게 과거로 되돌아 가면서 내가 그 친구의 나이 때 잘 듣지 않았던 음악들을 챙겨 듣는 와중이었다. 애청곡 목록에 송골매, 작은거인, 이장희, 조용필 등이 쌓여갔다. 나이 서른 즈음의 얘기다.

그러던 차에 ‘7080’이 뜨고 있다. 한창시절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옛날 가수들이 속속 브라운관으로 복귀하고 있다. 다시 보는 그들은 ‘촌스러운 젊은이’에서 ‘세련된 중년’으로 변신한 모습들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주말 심야의 짧은시간 동안 과거의 추억 속으로 아스라이 잠행하면서 일상의 피로를 잊는다. 그런데 내겐 지금도 어디에선가 음악활동을 하고 있을 그들이 불현듯 메이저방송사에 소환되어 주말 밤의 피로회복제로 쓰이는게 영 마땅치가 않다.

업종전환에 성공한 몇몇을 제외하곤 그들은 여전히 활동하는 현역들이다. 한때의 바람에 살고 죽는 게 유행가의 팔자라지만, 그들의 삶이 현재진행형이듯, 그들의 음악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적어도 내가 찾아 듣는 그들의 음악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의 정서와 감수성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당대의 산물들이다. 그것이 70년대에 나왔든 80년대에 나왔든 내게 미치는 영향들은 숱하게 듣게 되는 여러 형식의 음악들과 함께 늘 2005년의 어느날에 현존한다. 배철수의 타령조 보컬을 들으며 마음의 오지 속에나 흩어져 있을 빛 바랜 사진들을 다시 들출 생각이 나에게는 없다.

그런 연유로 요즘의 복고지향 프로그램들에서 다시 불려지는 노래들이 내겐 너무도 애처롭게 여겨진다. 한정된 타깃을 미리 설정한 마이너리티 지향의 프로그램 속에서 ‘추억을 파는 상품’에 그칠 정도로 한국의 70,80년대 음악이 구린 건 아니다. 일견 달짝지근하고 순진하고 기술적으로 일천해 보이긴 하지만, 그것들이 생산된 시대적 배경이나 뮤지션들의 분투기를 들춰보면 한 시대가 지니고 있는 문화의 힘과 파장이 무척 생동감 있게 녹아있는 걸 알 수 있다. 일례로 대중음악에 대한 무지한 편견과 가히 원시적이다 싶을 정도로 미비한 시스템 속에서 사랑과 평화 김수철 조용필 등의 장인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숙고되어야 할 한국 대중음악사의 정점들이다. 때문에 ‘공중파 속의 미사리’를 지향하는 듯한 ‘콘서트 7080’등의 프로그램을 보는 마음이 마냥 반갑지 만은 않은 것이다. 시시콜콜한 옛날 얘기나 들려주는 아저씨 취급하기엔 한국가요의 노장들이 아직, 너무도 젊다.

소수의 아이돌 스타와 그들을 추종하는 어린 팬들의 눈치밥을 먹어야 하는 쇼프로그램의 생리를 부언하는 건 불필요하다. 그러는 게 ‘안전빵’이라는 믿음은 문화적 역량의 전무함과 소양 없음을 자인하는 것과 진배없으며 제대로 들려주지도 않으면서 세대간의 감수성 차이를 왈가왈부하며 대중의 호응도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요즘 세대의 감각에 맞지 않는다는 편견은 당최 어느 얼빠진 기획자가 퍼뜨린 취향의 파시즘인가.

대중의 취향은 미묘하게 변화하면서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이동한다. 따라서 이전엔 전혀 듣지 않았던 노래들을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 듣게 되는 일이 특별히 예외적인 현상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방송사는 나이대 별로 특정 형태의 음악들을 재고정리하듯 배치, 편성한다. 그 궤적을 그대로 좇자면 지금 ‘콘서트 7080’ 시청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요무대’시청자로 흡수되는 게 수순일 듯싶다. 그 과정에서 뮤지션들은 옛날에 만들어 부르던 특정 노래 한두 곡만 십 수 년씩 우려먹게 된다. 그러니 새로운 음악적 시도니 하는 것들은 풍월로만 듣는 딴 나라 얘기일 수밖에 없다. 가수라면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몽땅 앵무새로 만들어 버리는 마술은 어쩌면 이 유구한 취향의 파시스트들이 터득한 기상천외한 대중조작인지도 모른다.

아울러 정반대되는 희한한 현상이 또 있다. 한창 날린다는 젊은 가수들이 십 수년 묵은 노래들을 말랑말랑하게 리메이크해 총체적 불황이라는 음반시장에서도 톡톡히 재미를 보고있다는 사실이다. 이건 ‘추억 팔아먹기’의 변종된 형태이다. 그리고 그 가공된 추억을 소구하는 건 그들에 열광하는 어린 팬들이다. 그러나 기왕에 있던 멜로디 라인과 코드 진행을 그대로 따와 ‘세련되게’ 편곡한다고 해서 본래의 노래가 지깟니고 있던 질감이 그대로 살아날 수는 없다. 소위 ‘창조적 재해석’이란 건 재해석을 하는 뮤지션의 성향과 스타일이 개성적으로 드러났을 때라야 가능하다.

그런데 자신의 오리지널이 아닌 리메이크한 노래가 대표곡이 되어버리는 기이한 현상을 자주 목도하게 된다. 한 가수가 앨범 전체를 리메이크로 채우는 괴이한 기획음반은 이제 ‘몇 점 먹고’ 들어가는 안전빵 컨셉트로 먹히고 있는 듯싶다. 김광석의 ‘다시부르기’연작이나 소위 ‘한국록’을 다시 불렀던 윤도현도 예외가 아니다. 그 앨범들의 성과와 평가가 어떻든 그것들은 내게 한국 가수들의 전반적인 ‘창조력 빈곤’의 명백한 증거물처럼만 보인다. 매일 똑같은 노래만 불러대는 가수들. 그리고 특정한 가수에게서 특정한 노래만 변함없이 주문하는 ‘지조 높은’ 방송과 거기에 수동적으로 이끌리며 창백하게 환호하는 대중들. 이 기막힌 삼위일체의 하모니에선 그러나 아무런 생동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7080’ 속으로 들어가 보자. ‘7080’의 주요 타깃은 대략 서른에서 마흔 사이의 장년층이다. 김광석처럼 ‘또 하루 멀어져 간다~’며 씁쓸히 생의 절반을 반추하기도 하고 봄여름가을겨울을 들으며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칠 정도로 삶의 신산에 어느 정도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과거란 순수한 오류였거나, 불안한 미래의 전초전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서른 즈음을 넘긴 사람은 현실에 적응해 나가는 방식으로 감성의 첨예한 돌기들을 누그러뜨리며 스스로를 보위하는데 열중하게 된다. 자기자신을 정물화시키는 그걸 성장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또 하루 멀어져 가는 것이 절박해지는 이들에게 삶이란 이미 오래 입어 해져버린 낡은 청바지처럼 생기가 지워져 있다. 그러면서 자꾸 ‘10년 전의 일기장’을 펼쳐보게 된다. ‘콘서트 7080’을 보면 볼수록 맥이 빠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1980년 조용필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며 절규했지만, 2005년의 나는 문득 ‘누가 추억을 아름답다 했는가’라고 따져 묻고 싶다. 왜 ‘7080’은 그 노래들이 옛날 노래라는 걸 자꾸 상기시키려고 하는가. 수 년 만에 공중파 방송에 불려 나온 왕년의 스타에게 던지는 ‘여전하시네요’라는 등의 립서비스가 내겐 너무 생뚱맞고 민망하다. ‘록음악을 하기엔 너무 늙었다’라는 말은 물 건너 노장들의 오랜 명언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환갑 근처에서도 늘 싱싱하게 무대를 뛰어다니며 노래한다. 마치 록음악을 하기에 너무 늙어버린 스스로의 나이를 낭비하려는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여전한 설득력과 대중 장악력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기준도 근거도 빈약한 음악적 취향의 세대별 분류법 따위가 있을 수 있다는 게 내겐 요령부득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기습적인 눈발이 날리던 얼마 전의 술자리에서 시인 H가 내게 했던 말이 새로운 음악적 가능성에 대한 암시로 다가온다. ‘트로트는 펑크다!’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해 볼 마음이 있다면 nietz4@naver.com으로 이메일 주시라. 참고로 요즘 내가 즐겨 하는 음악적 상상은 ‘황성옛터’ 등을 방만하게 연주해내는 20대 열혈밴드의 맺힘 없는 절창이다. 노래는 늘 그것을 부르고 있는 그 사람의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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