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대에는 물론이고 지금도 가문을 따져 사람의 품격을 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고금에 차이가 있다면 조선시대에는 주로 선대의 벼슬이나 학문 전통으로 가풍과 가격(家格)을 매긴데 비해 요즘은 재산의 비중이 좀 더 커진 정도라고 할까. 그래서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뼈대 있는 가문’의 내력을 엿보는 일은 단순히 호사가 취미 이상의 사회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전문위원으로 장서각에서 고문서 조사를 담당하는 김학수(38)씨가 17세기 대표적인 명가 4곳을 골라 그 가문이 명문이 된 내력과 집안 모습을 살핀 ‘끝내 세상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를 냈다. 그가 굳이 17세기의 명문 가문을 꼽은 것은 이 시기가 특별히 주자학적 종법 질서에 따라 부계 중심의 친족 의식이 대두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김 전문위원에 따르면 16세기만 해도 외가에서 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처향이나 외향을 따라 낙향하거나 집을 옮기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친가나 외가, 처가 구분도 별로 없었고, 아들과 딸을 구분하거나 친손을 특별히 여기는 인식도 뚜렷하지 않았다.혼인과 상속 제도도 이때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혼례를 올린 뒤 남자가 여자집에서 사는 것)에서 점차 친영(親迎·여자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남자집으로 맞아 오는 일) 제도가 확산되었고, 상속도 자녀 균분에서 아들, 그 중 장자의 비중이 높아졌다. 가계 계승의식이 강조돼 양자제도가 일반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런 변화에 따라 가문의식이 굳어졌으며, 그를 뒷받침 하기 위해 족보 제작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17세기를 문벌 가문 형성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전문위원은 먼저 안동 김씨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 가문을 꼽았다. 안동 김씨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왕조를 개창하는데 공을 세운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데, 지방의 선비 가문이던 이 집안은 청음의 증조부 김번이 문과에 합격해 서울에 정착하면서 명가의 초석을 놓았다. 김상용 김상헌 대에 이르러 가문이 번창일로를 걸었으며, 김상용이 병자호란에서 순국하고 김상헌이 청나라에 끌려가서도 기개를 굽히지 않아 무엇보다도 ‘충절’이 드높은 가풍을 만들었다.
청음 손자 대에 이르러 김수증-수홍-수항 형제와 수항의 아들인 김창집-창협-창흡-창업 형제가 특히 문예쪽에서 이름을 내면서 이 가문은 누구도 넘보기 힘든 명가로 자리를 굳혔다. 특히 김수항 3형제 시기에는 창녕 조씨, 안정 나씨, 용인 이씨, 풍산 홍씨, 전주 이씨, 은진 송씨, 한산 이씨 등 당대의 명문들과 통혼, 혼맥을 통해 사회적 기반을 강화한 것이 특징이다.
이어 나주 반남 박씨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1629~1703) 가문. 고려 중기 박응주를 시조로 하는 이 가문은 출발은 미미했지만 목은 이색 문하생인 박상충이 서울로 진출하면서 서광을 본 뒤 태종의 지우인 박은을 배출해 명가의 반열에 오르고, 박세당에 이르러 최고 가문으로 부상한다. 특히 박세당은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임금께 직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결국 벼슬을 멀리하고 수락산에 은거해 30년 넘게 학문에만 정진해 이 가문을 ‘지성 강단’으로 만들었다.
목은 이색의 후손인 한산 이씨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 가문은 여러 대를 이어 큰 벼슬을 한 것이 명가의 밑거름이 됐고, 연안 이씨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 가문은 3대에 걸쳐 대 문장가를 배출해 유명해졌다. 책은 이 가문들의 내력과 가풍을 여러 그림과 문집 등 자료를 통해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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