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이나 즐길까 하여 지하철 대신 택시에 올랐다. 택시 안 라디오에서는 막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중략)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라고 흥얼거리는 오랜 노래였다. 예로부터 한복을 입을 때에 미혼자는 다홍치마에 노랑 저고리요, 약혼자는 연분홍 치마에 연분홍 저고리를 입으라 했으니 노래의 화자(話者)는 필시 약혼녀일터.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눈앞에 있고 봄바람은 아른 아른 불어오니 날이 가고 달이 가는 줄 모를 어느 여자가 불렀음 직한 노래다. 꽃이 피고 지는 것조차 함께 느껴주던 그의 맹세에 취하다 보니 어느새 봄이 지나갔더라는 노랫말이 사랑도, 세월도 유한(有限)함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유한한 올 봄도 금방 가버릴 것이다. 봄날이 지난 다음 후회 말고 지금 당장 봄볕, 봄맛, 봄을 즐기자.
◆ 돌나물 알밥
‘봄맛’ 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봄나물이다. 달래, 냉이 쑥은 그 이름만 들어도 향기롭다. 봄에 캐는 나물에는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하여 겨울 동안 둔해져 있던 신진 대사를 촉진 시키는 데 한몫을 한다. 된장을 연하게 풀어 냉이만 넣%6어 끓여도 숙취와 피로를 해소 시키는 특식이 되며, 소금 간 한 쌀가루에 설탕과 쑥을 버무려 김 오른 찜통에 삼십분만 찌면 봄내 팍팍 나는 디저트 완성이다. 요는, 봄맛을 즐기는 데 큰돈이나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정선장이나 모란시장까지는 못가더라도 동네 슈퍼에라도 들러서 나물 코너를 보자. 냄새도 맡아보고, 이름도 물어 가며 둘러보다가 유난히 필(feel)이 꽂히는 봄 식재료 한두 가지만 골라오면 된다. 오늘의 재료인 돌나물은 그 아삭한 씹는 맛과 풋내 때문에 봄이면 한 움큼씩 매끼마다 먹게 되는 나의 영양식이다. 몇 백 그램을 사든, 튀김 가루 묻혀 튀겨 튀각처럼 먹거나 물김치를 담그거나 고추장 양념하여 밥에 곁들이거나 하면 되니 남길 것이 없다. 오도독 씹는 재미가 일품인 날치 알과 찬밥을 팬에 달달 볶다가 참기름 약간으로 마무리하고, 매콤 새콤하게 양념한 돌나물을 한 줌씩 얹으면 입안이 즐거운 맛이 탄생한다. 꼬들꼬들하게 볶아진 밥과 함께 씹히는 날치 알, 그리고 사각 거리는 돌나물 때문에 별다른 반찬도 필요가 없다. 여기에 냉이국이 곁들여지면 봄 냄새가 진동하여 아로마 테라피를 방불케 하는 식탁이 될 듯.
◆ 화전, 봄동전
작년에는 봄이 일찍 왔었다. 3월 2일에 해남으로 출장을 다녀온 내 애인이 진달래를 꺾어다 주었던 기억이 있으니 확실히 올해보다 따뜻했었지 싶다. 일찍 본 진달래가 너무 반가웠다며 한 가지 뚝 꺾어 생수 병에 꽂고는, 꽂이 시들까 휴게소에도 안 들르고 세시간만에 달려왔던 남자. 그는 지금 연분홍 치마를 입은 내 곁에서 절절한 맹세를 읊고 있고, 나는 봄날이 가는 줄도 모르게 화전을 부친다. 황진이가 놀던 시대에 보면 꽃놀이 나가 자리를 한번 펴면 꽃 따고, 전 지지고, 시 읊으며 종일을 보내곤 했었다지만 21세기에는 다들 너무 바빠서 그런 멋을 부리기가 힘들어졌다. 맑은 진달래조차 구하기 어려우니, 공해에 찌든 디지털 시대에는 ‘풍류’란 단어가 공룡 화석처럼 아득한 옛말로 들릴 수밖에. 아무튼 나는 작년에 얻은 진달래를 반(半)은 책갈피에, 반은 급속 냉동고에 보관했었다. 그리고 오늘 까만 팬에 기름을 달구어 익반죽한 찹쌀 위에 똑똑 한 잎씩 붙여 넣어 가며 화전을 지지깟는 것이다. 진달래가 없다면 화차(花茶)를 우려낸 식용 꽃을 펴서 말린 후 사용 할 수 있고, 대형 마켓에서 파는 펜지나 데이지 같은 식용 꽃을 사도 예쁘다. 아니면 쑥이랑 잘게 썬 대추로 모양을 내어 보거나 아쉬운 대로 봄동에 부침 가루 반죽을 묻혀 지져내도 맛은 좋다. 이때, 화전에는 산딸기 술로, 봄동 부침개에는 매실주로 흥을 맞추면 멋진 봄맞이가 될 것이다.
‘봄’은 일상적인 말들도 단숨에 새단장을 시켜준다. 예를 들어 봄볕, 봄비, 봄나물과 같이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단어들도 ‘봄’하나를 머리에 달면 풋풋해 진다. 볕이나 비나 나물도 우리 인간과 똑같이 사계절을 산다. 그래도 그네들은 "봄날은 갔네 "하는 안타까운 말을 하지 않는다. 다음 봄이 또 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다음 봄이 올 때까지 열심히 버텨서 다시 봄볕, 봄비, 봄나물이 되려고 묵묵히 살 뿐이다. 우리도 ‘봄날은 다시 온다~’고 노랫말을 바꿔보면 어떨까? 인간의 사랑과 세월이 유한하다지만 다음 봄이 올 때까지 함께 버텨보는 노력과 정성으로 그 한계를 극복해 봄직 하지 않은가.
푸드채널 '레드쿡 다이어리' 진행자
◆ 화전
찹쌀 5컵, 진달래꽃 20송이, 소금 1/2 큰 술, 끊는 물 1컵, 꿀 또는 설탕시럽 1/2컵, 기름 1컵
1. 식용꽃은 물로 씻어 물기를 말려 둔다
2. 찹쌀가루는 소금과 섞어서 한 번 체친다.
3. 1을 익반죽하여 동그랗게 빚는다.
4. 팬에 기름을 붓고 달구어 2을 지진다.
5. 3의 찹쌀반죽이 한 면 익으면 뒤집고 익은 면 위에 꽃을 눌러 박는다.
◆ 돌나물 알밥
돌나물 300g, 고추장양념 2 큰 술(고추장, 물엿, 설탕 조금, 식초, 깨소금, 참기름), 날치알 150g, 찬밥 2공기, 참기름 약간.
1. 나물은 고추장 양념을 해 둔다.
2. 팬을 뜨겁게 달구어 참기름을 조금 뿌린 후 밥과 날치알을 재빨리 볶아낸다.
3. 2를 한 김 식혀서 대접에 담고 1의 나물을 넉넉히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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