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개정안이 2일 통과함에 따라 가족제도가 혁명적인 변화를 맞게 됐다.
호주제는 2008년 1월1일 폐지되고 호적 대신 1인1적(籍)의 ‘느슨한’ 가족기록부 형태의 새로운 신분등록부가 쓰이게 된다. 또한 부부가 결혼 전에 합의하면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으며 부모와 성이 달라 고통받던 재혼가정의 자녀도 성을 바꿀 수 있게 된다. 동성동본끼리 혼인을 할 수 없었던 규정이 8촌 이내의 근친간만 혼인할 수 없도록 바뀌게 된다.
호주제는 1957년 민법 개정 후부터 가족법 개정 때마다 폐지 요구에 부딪혀왔다. 아내는 남편보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딸은 아들보다 하위에 있는 호주승계 순위의 불평등, 결혼 후 여성은 남편 집으로 호적을 옮겨야 하고, 자녀는 무조건 아버지 호적에 입적해야 했다. 이번 민법 개정으로 법률상 남녀평등을 이룬 셈이다.
◆ 남성 중심에서 남녀 평등으로 = 기존의 호적이 폐지되고 ‘1인1적’을 원칙으로 하는 새 신분등록부가 국민 1인당 1개씩 만들어진다. 신분등록부에는 출생, 결혼, 이혼 등 본인의 신분변동사항과 배우자, 본인·배우자의 부모, 형제·자매, 자녀 등 가족의 간략한 인적사항이 함께 기재된다. 신분등록부는 본인과 법률에 정해진 국가기관만 발급 받을 수 있다.
호주는 없어진다. 여성이 결혼하면 원래 호적에서 제적되고 남편 호적에 새로 입적했다. 하지만 이젠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여성도 자신의 신분등록부를 계속 보유한다. 결혼하면 자신의 신분등록부에 남편의 이름이 기재되고 자신의 이름이 남편의 신분등록부에 오를 뿐이다.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이 사라지는 것이다.
새 신분등록부에는 신분변동사항은 본인 것만 기재되고, 부모 등 가족의 신분변동사항은 기재되지 않기 때문에 부모의 이혼·재혼 등의 사실을 알 수 없어 사회적 편견을 받지 않게 된다.
◆ 어머니 성도 따를 수 있다 = 현행 민법 781조 1항에 따르면 자녀는 무조건 아버지의 성과 본(本)을 따르고 아버지의 가문에 입적해야 했다. 하지만 민법 개정으로 원칙적으로는 아버지의 성·본을 따르지만 부부가 혼인신고시 합의하면 태어날 자녀의 성·본을 어머니의 것을 따를 수 있다.
또한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자녀가 부모의 성과 달라 고통을 받을 경우 법원의 허가를 받아 자녀의 성을 바꿀 수 있다. 이혼 가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한 미혼모의 경우 아버지가 나타나도 법원의 허가를 받아 어머니의 성·본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미혼모가 키우던 아이도 아버지가 나타나면 반드시 아버지의 호적에 옮겨야 되고 아버지의 성을 따라야 했다.
◆ 가족 범위 넓어진다 = 현재는 호주를 기본으로 해 호주의 배우자, 혈족과 그 배우자, 기타 민법에 의해 그 가(家)에 입적한 자로 가족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배우자, 직계혈종 및 형제자매, 생계를 같이 하는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배우자의 형제자매로 바뀐다. 즉 생계를 같이 하는 경우에는 며느리와 사위, 장인, 장모, 시아버지, 시어머니, 처남, 처제까지 포함된다.
◆ 친양자제 도입된다 = 15세 미만의 어린이가 양아버지를 맞을 경우 새 아버지의 성을 따르고 신분등록부에도 양아버지의 친생자로 기재, 법률상 친자녀와 똑 같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친양자는 3년 이상 혼인 중인 부부가 가정법원에 청구해 입양할 수 있다. 입양가정의 안정을 위해 도입된 친양자제는 친생부부의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 다만 재혼한 어머니나 아버지를 따라온 자녀를 친양자로 입양하려면 혼인 기간이 1년 이상이어야 한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 2008년부터 시행 예정/ 새 신분등록제 마련해야
민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동성동본 금혼제 폐지 이외에 호주제 관련 조항과 친양자제도, 성씨 관련 조항 등은 2008년 1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호주제 폐지에 따른 새로운 신분등록제도가 아직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달 초 호주제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현행법의 적용시한을 민법 개정안 시행 시점이 아닌 호적법 개정 시점으로 정했다. ‘호주’(戶主)라는 개념을 위헌으로 결정하면서 새로운 신분등록제도 마련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따라 법무부와 대법원은 지난달 새 신분등록 방안을 각각 제시했다. 양 기관이 제시한 방안은 호주를 중심으로 부모의 성명, 배우자, 미혼 자녀 등의 신상정보가 기재된 호적등본과 달리 개인당 1개의 신분등록부를 만들도록 한 ‘1인 1적’을 새 신분등록제의 모형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정부는 조만간 법무부 주관으로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신분등록법제정위원회’를 구성, 상반기 중에 호적법을 대체할 ‘신분등록법’ 제정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이 경우 국회는 제정법안에 대한 공청회 등의 절차를 거쳐 새로운 신분등록법을 확정하게 된다. 그러나 여야 내부에 일부 이견이 존재하고 유림 등의 반발도 여전해 법안 통과시점이 정기국회 때까지 미뤄질 수도 있다는 전망이 적지 않다.전문가들은 신분등록법 제정안의 통과와 이후의 제도 보완에 최소한 2년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 남윤인순 여성단체연합 대표
"더 이상 호주제를 피해 이민을 가거나 멀쩡한 자식을 미아로 만드는 비극이 사라지게 돼 다행입니다."
2005년 3월 2일. 여성계의 숙원이었던 호주제를 폐지하는 내용을 담은 민법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날, 호주제 폐지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남윤인순(47·사진) 상임대표는 굳이 기쁜 표정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1958년 민법 제정 이후 반 세기, 99년 본격적인 호주제 폐지 운동을 시작한 지 6년 만이다.
"언젠가 한 재혼 여성이 전화해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호주제가 폐지될 수 있느냐고 물어온 적이 있어요. 새 아버지의 성으로 불러주고 있는데 전 남편 성으로 된 취학통지서가 나오면 아이가 겪을 혼란이 두렵다는 거였습니다." 이렇게 호주제는 생각보다 많은 가정에서 삶을 옭아매고 있다는 게 남윤 대표의 설명이다. 이렇다 보니 아예 이민을 떠나는 재픽Ⅰ≠ㅅ? 많고 심지어 아이의 성을 바꾸기 위해 허위 실종신고를 한 뒤 뒤늦은 출생신고로 새 아버지의 호적에 올리는 경우까지 있다.
여성계에 기념비적인 일로 받아들여질 쾌거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남윤 대표는 "폐지 운동 초기 지지 여론이 미미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며 그간의 고충을 토로했다. 꾸준한 홍보와 캠페인 덕분에 여론이 조금씩 폐지에 우호적으로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국회에서 거대한 벽에 부딪쳐야 했다. 2003년 16대 국회에 상정된 폐지안이 국회의원들의 무성의로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건 것. 남윤 대표는 "잠시 ‘이제는 됐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며 "이 때부터 여성의원 당선 운동 등 정치권에 대한 공략을 강화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아직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니다. 남윤 대표는 아직도 호주제 폐지의 의미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호주제 폐지는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변화해가는 시대상에 맞춰 가족 개개인을 존중하는 평등하고 열린 가족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호주제 폐지에 따른 대안 문제를 고민하고 보다 바람직한 가족관계를 위한 가족 정책 마련 등에 주력하겠다고 그는 약속했다.
진성훈기자 bluejin@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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