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가 나라꽃이고, 그 자체로 우리 민족의 환유(換喩)로 자리잡은 연원을 밝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민족’이 아니라 땅과 삶을 공유한 동류로서의 ‘민족’이라는 거대한 정신과 실체적 상징의 시원을 밝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숱한 사료들이 입증하는 바, ‘나라꽃=무궁화’의 인식이 일제36년 강점기를 통해 확고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외부적 자극과 그에 대한 반발력으로 무궁3화의 이미지가 정련되고 굳건해졌다는 점에서 그 수난사를 되짚어보는 일은 민족의식의 굵은 뿌리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무궁화는 한반도 유사이래 민족의 정신과 문화에 밀착된 꽃이었다. 멀리 산해경에서부터 고려 예종이 나라를 ‘근화향(槿花鄕)’이라 일컫고 나라의 상징으로 무궁화를 썼다거나(중국 ‘동경잡지’ 등), 조선 실학자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에 ‘군자지국 지방천리 다목근화’라는 문장을 담은 사실 등 숱한 문헌들을 보더라도 그렇다.
하여, 말과 글과 역사를 빼앗기고 언로마저 차단당한 일제 침탈기에 무궁화는 민족정신의 구체적인 실체였고, 침략자와 수난자 사이에 놓인 정신의 영토였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구한말 나라의 문이 열려 외세의 침탈이 시작될 즈음, 서재필 등이 주축이 되어 독립문을 기초하고, 그 정초식에 애국가(후렴-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를 부른 것(1896년)도 그 같은 보이지 않는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다.
일제는 1926년 2월27일자 ‘시대일보’에 ‘근역(槿域)은 일본의 이칭(異稱)’이라 주장하는 글을 실었고, 28년 우오익(당시 숭실전문 교수)은 ‘청년잡지사’가 간행한 ‘청년지’ 8권에 ‘무궁화 예찬’이라는 글로 이를 통박하기도 했다. 일제 말기 무궁화에 대한 탄압은 더욱 노골적인 양상으로 전개됐다. 보이는 대로 뽑아버리고, 있는 대로 불지르고, 무궁화와 닮은 문양만 지니고만 있어도 불령선인이라며 붙잡아 들였다. 노랫말 또는 모표가 문제가 돼 교가가 금지되거나 모표를 압수당하는 사례는 빈번했다. 강원도 홍천에서 무궁화를 키우며 민족사상 보급에 앞장서던 남궁억 선생이 투옥되고 7만주에 이르던 무궁화동산이 불태워진 사건(1933년)도 있었다.
해방후 48년 수립된 정부는 문교부령으로 입법 사법 행정 상부의 배지를 무궁화도안으로 채택했으나, 50,60년대 격동기와 ‘국화논쟁(56년)’ 등을 거치면서 무궁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시들해졌다가, 70년대 경제성장이 본격화하면서 류달영 윤극영씨 등의 정신문화 운동으로 확산된 무궁화 선양운동이 80년대에 까지 이어졌다. 82년 정부는 무궁화 1,000만 그루 심기운동을 펼쳤고, 그에 즈음해 전국적인 무궁화 전시화, 사진전, 글짓기대회 등이 붐을 이루기도 했다. 96년 ‘국가상징자문위원회’는 애국가와 태극기 등과 함께 대한민국 국화를 ‘무궁화’로 공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궁화연구회 박춘근(朴春根·62) 이사는 "무궁화는 민족정신의 뿌리이자 실체인 만큼 시절과 때에 따라 찾고 말고 할 대상이 아니다"며 ""근년 들어 무궁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줄어드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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