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포유류 가운데 ‘지느러미 다리’를 가진 기각류가 있다. 다리, 특히 뒷다리가 헤엄치기 좋게 지느러미 형태를 하고 있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물개 바다표범 바다코끼리 물범 바다사자 등 종류가 다양하다. 송곳니가 길게 삐져 나온 바다코끼리나 점박이 무늬를 가진 바다표범을 빼고는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흔히 통틀어 물개라고 부르기 때문에 ‘물개 쇼’에 물개 아닌 다른 기각류가 출연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 중에서도 강치는 정말 물개와 닮았다. 한자어 ‘해려’(海驢), 신라틴어 ‘오타리아’로 불리기도 한다.
■ 1740년께 정리된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울릉도는 동해 가운데 있으며… 산물 가운데 물고기에 가지어(嘉支魚)가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가지어에 대한 기록은 정조실록 정조 18년 6월조에도 나온다. ‘월송 만호 한창국이 하루 만에 울릉도에 도착했으며… 가지도(可支島)에 가서 가지어(可支魚) 두 마리를 포수가 잡아서 그 가죽을 대나무 자단향 등과 함께 토산물로 가져오고 지도 한 장도 그려왔다.’ 이 가지어가 바로 강치이고, 가지도가 곧 독도다. 얼마나 강치가 많이 서식했으면 강치섬으로 불렸을까.
■ 강치 모피에 쏠린 인간의 욕심만 아니었다면 강치는 대를 이어 독도의 바위를 덮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독도 강치가 속한 전체 ‘일본 강치’가 1951년 멸종했다고 적고 있다. 남획의 주역은 일본인이었다. 1693년의 안용복 사건으로 끊겼던 일본의 울릉도 침탈은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의 대외팽창 흐름을 타고 재개됐다. 집요하게 반복된 일본인의 울릉도 연안 불법어로와 울릉도 불법 정착은 1898년 사실상 합법화됐다. 오키(隱岐)섬과 울릉도를 수시로 오간 일본인들이 독도 강치의 모피와 기름에 간과할 리 없었다.
■ 오키섬 출신의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는 1903년 독도 강치잡이를 시작해 톡톡한 재미를 보았다. 경쟁자가 몰리자 이듬해 그는 강치잡이를 독점하기 위해 일본 정부를 통해 조선으로부터 독도를 임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독도의 군사적 중요성에 눈뜬 일본 정부의 속내를 읽은 그는 ‘독도 영토편입 및 임대청원’을 내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를 빌미로 1905년 1월 일본 각의의 영토편입 결정 및 2월22일 시마네(島根)현 고시가 나왔다. 일본이 주인 있는 밥상에 들이댄 첫 숟가락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