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84)가 23일 펴낸 책 ‘기억과 정체성’(Memory and Identity)에서 1981년 자신에 대한 암살 기도에 배후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해 눈길을 끌고 있다.
교황이 1993년 폴란드의 철학자 흐리지스토프 미할스키 등과 나눈 대화를 주 내용으로 한 이 책은 교황의 나이와 건강 상태 등을 고려할 때 생애 마지막 저술이 될 가능성이 높다. 파킨슨병 등을 앓고 있는 교황은 24일 호흡곤란 증세로 10여일 만에 재입원했다.
교황 암살 배후설은 원래 사건 직후부터 회자됐지만 교황 자신이 이를 시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 이탈리아 검찰은 불가리아 비밀 정보기관이 구 소련을 대신해 공산주의 종식을 외치는 교황 암살 계획을 세웠다고 의심했지만 밝혀내진 못했다.
교황은 이 책에서 사건 이후 암살 혐의로 투옥된 터키인 메흐메트 알리 아그자를 면회한 경험을 소개하면서 "그는 전문 암살자였다"고 회상했다. 교황은 "이는 아그자가 자발적으로 암살을 모의한 게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이 계획하고 지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20세기에 탄생한 폭력적 이데올로기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동성결혼과 낙태 등에 대해서도 언급한 이 책은 유태인 단체의 반발을 사는 등 뜻밖의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교황은 "인간이 신을 배제한 채 스스로 선악을 결정할 수 있다면 특정 부류의 인간 제거 결정도 할 수 있다. 이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나치에 의해 이뤄졌고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교황은 "‘악의 이데올로기’로 건설된 전체주의 국가는 멸망했지만, 지금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일부 정부, 의회가 ‘진보’란 이름 아래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잉태된 인간의 절멸을 법제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교황은 "동성결혼 합법화 압력도 인권을 인간과 가족에 반하는 방법으로 악용하려는 한층 교활하고 은밀한 ‘악의 이데올로기’의 일부가 아닌지 돌아보는 것은 정당하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낙태 등에 대해 교황이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 하지만 이번엔 유태인 단체들이 유태인 대학살(홀로코스트)과 낙태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 게 아니냐고 문제삼고 있다. "대량 인류학살과 여성이 자신의 몸에 하는 행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가톨릭 교회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예 이해하려 들지 않은 것"이란 비난이다. 한 추기경은 "교황이 양자를 수평 비교한 것으로 잘못 읽은 것"이라고 일축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 교황 독감 재발…퇴원 2주만에 재입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4일(현지시간) 미열과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퇴원한지 2주일 만에 이탈리아 로마의 게멜리 클리니코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고 교황청이 밝혔다.
교황청은 이날 성명을 통해 "교황의 독감 증세가 전날부터 악화돼 오전 10시45분께 전문적인 치료와 추가 검사를 위해 교황을 병원으로 옮겼다"고 발표했다.
이탈리아 ANSA 통신도 "교황이 이 달초 입원했을 때와 같은 증상인 호흡곤란 증세로 입원했다"고 보도했다. 교황은 지난 1일 독감과 심한 후두염 및 후두 경련을 앓아 이 병원에서 열흘 간 입원했었다.
빠른 회복세를 보여온 교황은 퇴원 후 처음으로 21일 일요 미사에 참석, 비교적 건강한 목소리로 설교 문을 읽어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도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23일 거행된 수요 주례 일반알현에서는 처음으로 직접 참석하지 못하고 비디오 중계로 이를 집행했다. 일반 알현은 교황이 매주 수요일 성베드로 광장이나 바티칸 강당에서 신자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1시간 정도 앉아서 진행하는 행사다.
ANSA 통신은 "교황의 용태가 중환자실로 옮겨질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입원도 예방 차원에서 취해진 것 같다"고 관측했다.
하지만 교황이 연로한 데다 파킨슨병과 관절염을 앓는 등 2003년부터 건강이 크게 나빠져 주위의 우려가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파킨슨병 전문가인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의 제이미 헨더슨 박사는 "진행성 질환인 파킨슨병 환자들은 보통 다른 합병증으로 사망하며 가장 큰 위험 요인은 감염"이라고 지적했다. 교황의 건강상태에 관한 첫 공식 발표는 25일 오전께 있을 것으로 알려졌다.
장학만기자 local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