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1절 독립유공자 포상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복권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몽양 여운형 선생을 비롯한 54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포상 대상에 포함됨으로써 분단 이후 남쪽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한 역사의 반쪽이 되살아난 셈이다. 그러나 근대사의 온전한 복원이라는 의미 있는 행사에서 훈격을 둘러싼 논란은 ‘옥에 티’가 되고 있다.
지난해까지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은 독립운동가는 모두 9,629명으로 대부분 민족주의 계열이었다. 사회주의 운돗동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념의 논리에 따라 번번이 서훈에서 배제돼 왔다. 이에 대해 사학계 등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이라고 해서 독립운동의 공적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며 정부에 줄기차게 재평가를 요구했다. 굳게 닫혔던 빗장은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 독립운동도 정당하게 평가돼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고, 지난해 국가보훈처가 공산주의자로 규정된 서훈 제외대상자를 ‘사회주의 국가건설 적극 동조자’로 완화함으로써 제도적 토대까지 마련하게 됐다.
신용하 국가보훈처 국가유공자 공적심사위원장은 사회주의 독립유공자의 서훈에 대해 "긍정적이고 높이 평가해야 할 방향 전환"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신 위원장은 또 "이 분들에 대한 포상은 정치분열로 발생한 이데올로기 투영을 지양하고 대한민국이 역사진실에 더욱 가깝게 접근, 통일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역사의 복원이 해방 60주년에 맞춰 이뤄진 데에도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60년 만의 역사복원인 만큼 진통도 적지 않았다. 이번 심사에서 관심을 모았던 몽양 선생의 훈격을 두고 심사위원들 간에도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면서 상당한 논쟁이 벌어진 것. 공적심사위는 1심 및 2심에서 몽양 선생에게 1등급 건국훈장 또는 2등급 대통령장 수여를 놓고 의견이 갈려 전체 심사위원들이 참석하는 합동심까지 열어야 했다. 신 위원장은 이와 관련, "(일반적인) 애국지사들에 대해서는 심사위원들이 후하게 드리려고 하는데 여운형 선생의 경우는 관심이 집중돼 있고 포상 자체를 반대하는 여론도 많아 너그럽게 하지 못하고 엄격히 규정에 따라 무기명 투표를 통해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몽양 선생에 대한 보수단체 등 사회 일각의 반대와 우려 목소리가 서훈 등급 결정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다.
몽양 선생에게 2등급 훈장인 대통령장이 내려진 데 대해 추모사업회측은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에서는 "역사의 발전으로 자축할 일"이라는 환영의 입장이지만 서훈의 격이 적절치 않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몽양 선생의 남쪽 유가족들도 일단은 환영하면서 훈격에 대해서는 "협의해서 입장을 발표하겠다"고만 했다. 추모사업회측도 지난 17일 회원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총회를 열어 ‘대통령장’ 서훈을 받을 것인지 여부에 대한 논의를 했으나 찬반 논란 속에 결론을 보지 못하고 안건을 일단 이사회로 넘기기로 했다.
김정곤기자 kimjk@hk.co.kr
■ 주요 인사 공적 내용/체포…투옥…옥사…‘고난의 발자취’
3·1절에 독립유공자로 포상받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일제 하에서 체포와 투옥을 반복하고 심지어 옥사를 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누구 못지않게 헌신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은 주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공적 내용.
◆ 여운형(1885~ 1947) = 1918년 중국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게 하는 한편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정을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22년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해 조선독립을 역설했으며 독립실현을 목적으로 김구 선생 등과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944년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결성해 조국광복을 준비하는 등 28년에 걸친 지속적인 독립운동으로 2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 권오설(1897~ 1930) = 3·1운동에 참여했다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1923년 경북 안동군 풍산에서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해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24년 조선노동총동맹 창립에 참가해 집행위원으로 선출됐고 일제의 언론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열린 언론집회압박탄핵회에서 위원으로 선임돼 결의문을 작성했다. 1925년 제2차 고려공산당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임돼 학생들과 연계한 6·10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했다.
◆ 조동호(1892~ 1954) = 1919년 신한청년당 이사로 선출돼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충청도 의원과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독립신문 창간에도 관여했으며 동아일보 선양(瀋陽)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재만동포의 피해실태를 보도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을 결성할 때 중앙위원으로 선출돼 일하다 옥고를 치렀으며 1944년에는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다.
◆ 강창보(1902~1945) = 1925년 조선사회운동자동맹의 창립에 참여하고 1927년 신간회 제주지회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일제의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돼 한 차례 옥고를 치렀으며 1943년 조선문제시국연구회 활동 등의 혐의로 다시 체포돼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숨졌다.
◆ 구연흠(1883~1937) = 구한 말 관원 출신으로 무산자동맹회 신사상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하였으며 1926년에는 제2차 조선공산당의 간부로 6·10만세운동을 추진했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 한국유일독립당 상하이촉성회에 참여하고 상하이한인청년동맹의 발기인 등으로 활동했다. 3·1운동 6·10만세운동 국치일 등을 기념하는 시위를 전개하다 일경에 체포돼 징역 6년형을 받고 복역하다 1937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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