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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4) 부재하는 실존의 그림자 - EBS 문화사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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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4) 부재하는 실존의 그림자 - EBS 문화사 시리즈

입력
2005.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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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늦여름 무렵, 무료하게 TV 채널을 돌리던 어느 주말 밤에 EBS의 문화사 시리즈 1탄 ‘명동백작’을 보게 되었다. 처음 본 장면은 시인 박인환(차광수)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힌 초췌한 모습의 시인 김수영(이진우)을 면회 온 장면이었다. 아마도 3회 정도쯤 되었던 것 같다. 박인환과 김수영의 대면이라는 한국문학사의 ‘뜨거운 감자’에 데어 이후로는 빼놓지 않고 보았다. 그러잖아도 김수영 산문집이나 고은의 ‘1950년대’ 등을 통해 상상만 했던 50,60년대의 문단 풍경에 대해 적잖은 호기심이 있던 참이었다.

‘명동백작’은 김수영, 박인환 뿐 아니라 급변하는 정치상황과 맞물려 당시 명동 일대를 주름잡았던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풀어나간 수작 드라마였다고 할 수 있다. 다소 설렁설렁하게 시간을 뛰어 넘는 탓에 김수영과 박인환이 갈등하게 된 원인 등이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기왕에 책으로 읽었던 내용들이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재연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했다. ‘명동백작’이란 제목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던 소설가 이봉구가 단순 내레이터였다면 실제 주인공은 김수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명동백작’은 한국전쟁에서 출발해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거쳐 1968년 6월16일 김수영이 사망하면서 막을 내린다.

EBS 최초로 실험한 미니시리즈 형식의 드라마로서 제작진도 놀랄만한 획기적 성과를 이루었다는 평가와 함께 다큐멘터리 형식의 제2탄 ‘100인의 증언, 60년대를 말한다’에 이어 지금은 3탄 ‘지금도 마로니에는’이 10회까지 방영된 상태다.

‘지금도 마로니에는’은 60년대 초 4·19와 5·16을 겪으면서 고뇌하는 당시 서울대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주인공은 김지하 김승옥 김중태이다. 문화사를 이야기하며 김중태를 중심에 놓은 게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김중태가 주도했던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집행식’ 을 ‘6·3세대를 대표하는 정치적 청년문화의 시발점’으로 주목했다는 게 연출의도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의 삶이 지리하게 여겨진다. 특히 김지하와 김승옥이 나오는 장면은 그들의 암울한 개인사에 대한 지나친 부연 탓에 오래 보고 있기 힘들 정도다. 부친의 좌익활동 탓에 연좌제 공포에 시달리는 김지하와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근근히 살아가는 김승옥의 가족을 통해 당시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갈등과 고난을 얘기하려 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도 평면적이고 어눌해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로니에는’이 처음 방영됐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김지하 김승옥 김중태에 대한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면서 60년대의 전반적인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고향 바닷가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김지하의 모습이나 가난과 실존에 대해 명상하는 김승옥의 우수어린 표정에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문제는 단순하다. 그들의 문제의식이 허황되거나 못미더워서가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캐릭터의 밀도가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단순히 연출력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당사자들의 고백이나 주변인물들의 증언을 극화하는 과정에서 제작자의 비약이나 오해를 최소화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얘기다. 더욱이 복잡미묘한 상황 속에서 한 인물이 일관된 성격이나 행동을 유지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여러 문제들을 감안하더라고 ‘지금도 마로니에는’에 나오는 김지하와 김승옥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들처럼만 보인다.

세상 고뇌를 한 몸에 짊어진 듯한 표정으로 바닷가에 뛰어들려던 젊은이가 명확한 반전 없이 상경해 동급생과 자리다툼을 하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설사 사실이 그랬었다 쳐도, 잘 공감이 안 된다. 그런 식으로 급전된 장면들을 보다 보면 중간에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려 같은 배우가 나오는 전혀 다른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심한 경우 보는 이가 사실을 곡해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설득력 있는 허구조차 완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다.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의 목적이나 동기는 제각각일 테지만, 드라마에서 생동감 있는 캐릭터는 무시 못할 요소다. 단순히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경으로 드라마를 본다 하더라도 극중에 나타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공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흥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이건 사실을 극화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보편적인 딜레마이기도 하다. ‘지금도 마로니에는’의 경우 10회가 방영된 지금까지도 그 딜레마를 푸는 방법론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그렇다면 똑같은 연출자(이창용)와 작가(정하연)가 만들었던 ‘명동백작’이 흥미로웠던 건 무슨 탓일까. ‘명동백작’의 호쾌한 편집에 비해 ‘지금도 마로니에는’이 어눌하게 여겨지는 건 단지 중심인물들의 성향 탓일까. 중간중간 내레이터(정보석)가 등장하는 모습이나, 특정한 몇몇 인물의 포커스에 따라 이야기의 각도가 변하는 등, 연출 상 큰 차이점은 발견되지 않음에도 ‘지금도 마로니에는’은 ‘명동백작’에 비해 지나치게 호흡이 처지는 느낌이다. 때문에 주인공에게 감정이 잘 이입되지도 않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저 ‘김승옥이 저렇게까지 어눌하진 않았을 텐데’라거나 ‘하길종은 왜 안 나오냐?’는 등의 생뚱한 반응만 나올 뿐이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역사적 사실의 진위 여부를 떠나 드라마 자체에 집중할 수 없다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역사 드라마도 대상인물을 사실 그대로 재현해낼 수는 없다고 했을 때, 관건은 그들을 얼마만큼 현실성 있는 인물로 받아들이게끔 만들어내느냐에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도 마로니에는’에서 그려지는 김지하와 김승옥은 ‘역사 속의 개인’이라는 거대 명제 아래 순수한 개인으로서의 핏기를 상실한 인물들처럼 보인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김승옥과 역사와 실존 사이에서 외줄타기하는 김지하. 그리고 순수한 정치적 기백으로 세상과 맞서는 김중태. 이들은 모두 그들 자신이면서 실재의 그들이 아니다. 지나간 사실에 대해 기록하는 행위엔 가필과 첨삭이 불가피하다. 더욱이 그것을 이야기 형태로 풀어낼 때에는 사실을 근거로 한 또 다른 허구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살아온 삶을 토대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근간에는 무수한 텍스트들이 존재하게 된다. 이때, 텍스트는 단순히 그들이 남긴 작품이나 그들에 대해 쓰여진 사료에 그치는 게 아니다. 당시의 그들조차 알 수 없는 역사적 맥락이나 차후에 덧씌워진 해석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그들의 삶에 관여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가공되어지는 그들은 현재의 관점에서 걸러지거나 재해석된 전혀 다른 인물들에 가깝다. 요컨대 브라운관이라는 물질적 형태로 직접 의식과 감각에 다가오는 그들은 여태껏 알고 있던 김승옥이나 김지하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얘기하자면, 드라마로 재연되는 그들의 삶을 진짜의 그들에 억지로 대입하지 않음으로써 보다 더 사실에 가까운 김승옥과 김지하에 대한 명징한 시각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다루어지는 대상의 시간적 거리가 현재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극화되어진 그 인물은 더더욱 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건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똑같이 경험하게 되는 문제이다. 그렇게 봤을 때 ‘명동백작’에 나온 김수영과 박인환이 보다 생동감 있고 흥미로운 캐릭터로 다가왔던 건 단순히 실재했던 그들의 성품이나 고난이 김지하 등의 그것보다 더 극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시간의 문제이자, 시각의 문제이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동시대성’의 문제일 수 있다.

특정한 해석지평 아래서 나름의 평가가 일단락된 사람의 경우, 보다 넓은 해석의 여지와 공감의 틀이 새롭게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불편하다. 그들 자신도 불편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불특정 다수도 불편하다. 특정 시대의 상징적 인물로 유형화되기에 그들은 여전히, 생물학적 나이를 불문하고, 너무도 젊다. 그들은 쓰여진 텍스트인 동시에 앞으로 계속 스스로를 다시 쓰게 될, 사라지지 않은 저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삶을 극화하는 타인들 역시 바라보면 볼수록 그들 아닌 다른 것으로 미끄러지는 또 다른 대상을 추적해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은 복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도 마로니에는’이 지향해야 할 건 김지하와 김승옥의 어설픈 재현이 아니라, 여전히 다른 것으로 진화하는 실존의 유형학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그 인물에 대해, 그리고 역사에 대해서 새로운 문제제기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바로 역사의 내레이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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