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4년 11월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일화 하나.
김 전 대통령은 마닐라 도착 다음날 아침 6시, 조깅을 하려고 경호사령부 골프장에 들렀다. 라모스 당시 필리핀 대통령도 함께 뛰기 위해 나와 있었다. 대단한 후의(厚誼)였다.
그러나 취지와는 달리 모양은 좋지 못했다. 라모스가 젊은 시절 농구 선수를 했지만, 오랜 세월 달리기를 해온 김 전 대통령을 따라갈 수 없었다. 김 전 대통령이 천천히 달렸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한참 처진 라모스는 조깅을 포기하고D 맨손 체조를 했다. 김 전 대통령이 조깅을 끝내자 라모스가 농구를 하자고 제안했다. 농구를 해본 적이 없는 김 전 대통령은 상대가 되지않았다. 결국 라모스 혼자 농구를 했고 김 전 대통령은 옆에서 체조를 했다. 유머집에나 나올 법한 해프닝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승부근성과 직선적 기질이 초래한 작은 ‘참화’였다.
상대국 정상의 자존심을 구겨버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김 전 대통령의 언행은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스타일이 외교에서는 먹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라모스는 서운해하고 말았지만 강대국들은 불쾌감을 결코 가슴에 묻어두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이 일본에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호언했을 때 일본은 한국에 빌려준 돈의 만기연장을 해주지 않는 방식으로 보복을 했다. 그리고 그 보복은 외환위기의 한 원인이 됐다.
한미정상회담 때 김 전 대통령은 논의를 마치고 일어나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다시 앉혔는가 하면, 회담 중 가끔 "이 친구 지금 뭐라카노"라고 통역에게 묻기도 했다. 그런 결례에다 수시로 바뀌는 대북 자세는 94년 핵 위기 때 미국이 북한 영변 폭격을 검토하면서도 한국 정부를 소외시켰던 숨은 이유 중 하나였다.
노무현 대통령도 기질 면에서는 김 전 대통령과 비슷하다. 하고 싶은 말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숱한 논란도 있었다. 그런 노 대통령이 북한 핵 문제가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데도 침묵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런 태도를 비겁하게 보는가 하면 친북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들은 노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향해 비난을 퍼붓기를 바란다. 그러면 일부의 가슴을 후련하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김 전 대통령의 사례에서 보듯 길고 깊게 돌아올 수 있다. 지금 노 대통령은 침묵의 미학을 체득하고 있는지 모른다. 상황이 더 분명해질 때까지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도 기다리는 인내를 가져야 하지 않을지….
정치부 부장대우 leeys@hk.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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