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2년 2월19일 프랑스 시인 장 앙투안 드 바이프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1589년 파리에서 졸(卒). 장 앙투안 드 바이프는 외교관이자 고전학자였던 라자르 드 바이프(1496~1547)의 사생아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년기부터 고전그리스 문학에 깊이 빠져들었고, 그 고전 취향은 평생의 이론적·창작적 글쓰기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가 프랑스어 철자법을 음성주의에 가깝도록 고치고 고전 운율을 창작에 도입할 것을 주장한 것도 이런 흔적의 일부다.
바이프는 고전그리스·라틴 극작가들의 작품을 여럿 프랑스어로 개작했고, 페트라르카풍의 소네트 ‘멜린의 사랑’ 외에 여러 권의 시집을 냈으며, 샤를9세를 설득해 ‘시와 음악 아카데미’를 세우는 등 제도 측면에서도 프랑스 시의 개혁에 진력했다. 그러나 16세기 프랑스 문학사에서 바이프라는 이름은 독립적으로 거론되기보다, 그가 일원이었던 플레야드에 묶여 거론되는 것이 보통이다.
본디 ‘브리가드(여단)’라 불렸던 플레야드는 바이프, 롱사르, 뒤벨레 등 시인 장 도라의 문하에서 배웠거나 그들과 의기가 투합한 일곱 시인을 가리킨다. 몇 차례 구성원의 변화를 겪었지만, 동인 수는 늘 일곱이었다. 플레야드라는 말 자체가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로 올라가 묘성(昴星)이 되었다는, 아틀라스와 플레이오네 사이의 일곱 딸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플레야드는 그래서 한자어권에서 ‘칠성시파(七星詩派)’로 번역되기도 한다. 플레야드는 기원 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 활동한 일곱 시인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16세기 프랑스의 플레야드는 그런 고전시대에 대한 선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고전시대로 돌아가기보다는 당대 프랑스어를 고전어 못지않은 문학언어로 끌어올리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뒤벨레의 ‘프랑스어의 옹호와 선양’은 이들의 이런 모국어관의 집중적 표현이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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