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8년 영국 옥스퍼드의 한 마을. 페스트가 번지고, 마을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참혹하게 숨져간다. 성직자 귀족 할 것 없이 이 보이지 않는 ‘죽음의 신’을 피해 도망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남아 병자를 돌보다 숨을 거두는 사람도 있다. 이 운명의 시간을 겪고 증언하는 이는 중세로 시간여행을 온 21세기의 한 역사학도다. ‘(도망친 이들은) 이 모든 사태가 끝나고 나면 어느 귀족가문의 조상이 되겠죠.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사는 시대가 엉망인지도 몰라요.’
코니 윌리스의 장편소설 ‘둠즈데이 북(Doom’s Day Book)’은 SF적 상상력과 고증을 통해 복원된 과거를 그 시대와 현재의 두 시선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계 조작 실수로 서구 역사상 최악의 재앙 한복판에 보내진 중세학도 키브린. 한 농가에 머물게 된 그는 중세적 공간에서 중세적 가치관과 어렵사리 조화하며 친분을 다져간다. 그러던 중 페스트가 발병하고, 주민들은 하나 둘 쓰러진다. 소설은 페스트로 상징되는 중세의 고통과 그 고통에 맞서는 이들의 모습, 귀족·성직자들의 타락하고 위선적인 행태들을 진저리 쳐지도록 생생하게 재현해낸다.
한편 현재 시간대에도 정체 불명의 바이러스가 번지면서 키브린 구출작전은 난관에 봉착하고, 재앙에 반응하는 이 시대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이 중세의 서사와 나란히 이어지며 흥미와 울림을 증폭한다.
이 소설은 당대 SF문학의 거물로 꼽히는 작가의 ‘옥스퍼드 시간여행 연작’ 두번째 작품으로, 이에 앞서 ‘개는 말할 것도 없고’가 번역돼 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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