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조금만 더 희망을 노래하자
미래는 저녁 창문처럼 금세 어두워지지만
작별해 버린 어제가 모두 탕진은 아니다
모래의 시간 속으로 걸어온 구두
밑창의 진흙은 숙명을 넘어온 기록이다
내 손은 모든 명사의 사물을 다 만졌다
추상이 지배하는 인생은 불행하다
명백한 것은 햇빛밖에 없다
죄마저 꽃으로 피워둘 날 기다려
삶을 받아쓸 종이를 마련하자
가벼워지고 싶어서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모든 노래를 받기 위해서 입 다무는 침묵처럼
오늘은 단추 한 칸의 가슴을 열자
오늘은 조금만 더 희망을 노래하자
시인에게 풍경은 사유의 재료다. 그 풍경이 인간 바깥의 독자적 세계가 아니라, 시인에게 포섭될 때라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렇게 포섭된 풍경은, 적어도 이기철 시인에게는, 더 이상 객체로서의 대상도, 사유의 재료도 아니다. 오히려 그 자체 시(詩)가 된다.
그래서 ‘벅찬 약속도 아픈 이별도 해본 적 없는 논밭/ 물소리가 다 읽고 간 들판의 시집을/ 풀잎과 내가 다시 읽는다’(‘들판은 시집이다’ 에서). 들판이 시집이니, 시인이 주체라고 말할 근거가 없다.
시인이란 ‘이 세상 모든 향기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 향기가 되는 이름’(‘시인이란 이름에는 들꽃 냄새가 난다’ 에서)일 뿐이다.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기철 시인은 그간 11권의 시집을 냈고, 이번에 ‘가장 따뜻한 책’(민음사 발행)이라는 제목으로 12번째 시집을 냈다. 그는 이 시집에서 지난한 시적 사유가 결국 사람을 향한 것임을, 개체들의 힘을 돋우고 닫힌 마음을 열고자 함임을, 해서 서로 사랑하자는 말을 하고싶었음을 나지막이 말하고 있다. ‘신발마다 전생이 묻어 있다/ 세월에 용서 비는 일 쉽지 않음을/ 한 그릇 더운 밥 앞에서 깨닫는다/ 어제는 모두 남루와 회한의 빛깔이다/ 저무는 것들은 다 제 속에/ 눈물 한 방울씩 감추고 있다/…생은 사는 게 아니라 아파하는 것이다’(‘따뜻한 밥’에서)
그의 반성은 ‘쌀 안치는 손의 거룩함’ ‘이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종교’를 깨닫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오늘은 조금만 더 희망을 노래하자’(인용 시)는 시어들이 은폐하는 이면의 풍경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일 만큼 직설적이고, 다감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그의 시가 ‘말씀’으로 풀어지지 않는 것은 비유로 구축된 말의 풍경과 말의 절제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딸랑딸랑 방울을 흔들며 따라오던 강아지가 옆집 강아지를 만나 어디론가 놀러 가버린 그 고요함을 말한 일이 없다…’(‘별이 뜰 때’) ‘…마구간의 암소가 갓 낳은 새끼를 핥아주는 걸 본/ 만월이 산등성이에 흰 궁둥이를 대고/ 눌러앉아 있는 보름밤…’(‘메밀꽃 필 무렵’) 같은 시행에 담긴 풍경은 동양화의 그것처럼 깊고 질기다.
시인은 후기에 ‘그리하여 시를 읽고 산문을 읽고 한 줄의 편지를 쓰는 일은 마침내 사람으로부터 멀어져 간 마음의 실 꾸러미를 내게로 팽팽히 당겨오는 일이니…’라고 썼다. 해서 ‘어둠 속에 생을 내려놓고 물끄러미 별을 쳐다보는/ 나와 함께 이 도시를 떠밀려 가는 사람들/ 그들의 내일이 환히 꽃피기를’(‘저녁 거리에서 생을 만나다’ 에서).
그렇게 정말 환히 피기를.
최윤필기자 walden@hk.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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