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영국 형이상학 시(詩)의 거두 존 던을 전공한 비비안 베어링 교수는 어느 날 의사로부터 말기 난소암 선고를 받는다. 사무적으로 진단결과를 전하고 항암치료과정을 설명하는 의사 앞에서 그녀는 현실을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죽음을 가장 중요한 은유로 삼아 온 존 던을 연구한 학자라는 직업의식과 50년간 치열하게 살아온 삶에 대한 자부심이 그 의연함의 원천이다. 그러나 검은 색 복장의 사내들이 주변을 서성거리며 죽음의 그림자를 불러내고, 8개월간의 항암치료에 육체가 뭉개지면서 그녀의 정신도 서서히 무너져간다.
연극 ‘위트’는 한 말기암 환자의 단순한 투병기가 아니다. 삶과 죽음을 둘러싼 아이러니와 진지한 유머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생명을 잉태하는 곳인 난소에서 죽음의 세포가 번진다는 설정부터 심상치 않다. 베어링은 남자의사에게 생리통을 빗대 통증의 성격을 설명하고, 의사들은 그녀를 좋은 임상도구로 생각한다. 베어링은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나는 암 때문에 격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암치료 때문에 격리되어 있다. 과연 존 던이라면 이 상황을 얼마나 즐겼을까"라며 학문적으로 해석하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허상이 아닌 진실한 삶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다.
삭발을 하고 무대에 오른 윤석화의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그녀는 모래시계서 모래알이 빠져나가듯 생명의 불꽃이 사위어가는 베어링의 모습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해낸다. 링거 바늘을 빼고 육신을 떠나 무대 뒤로 사라지며 그녀가 던지는 "죽음조차 나를 죽일 수는 없다"는 대사는 오랜 시간동안 큰 울림으로 관객들의 가슴을 저민다.
시종 무대 위를 가로지르는 콘트라베이스의 어둡고 묵직한 음악도 관객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단순한 무대장치와 차가운 금속성의 음향효과가 죽음의 냉기로 객석을 휘감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존 던의 시세계를 베어링의 삶에 연관시키는 대사와 극의 흐름이 감동을 조금 반감시킬 뿐. 마가렛 에드슨 원작, 김운기 연출로 국내 초연. 우림청담씨어터. 3월27일까지. (02)569-0696.
라제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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