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6자회담을 보이콧한 북한의 진의가 점차 드러나고 있다.
10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원칙적 입장을 천명한 이후 북한은 한성렬 주유엔 북한대표부 차석대사를 통해 자신들의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내놓기 시작했다.
한 차석대사는 10일 "미국이 우리와 직접 대화를 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변화의 신호로 볼 수 있다"고 말한 뒤 11일에는 APTN과의 인터뷰에서 "6자 회담은 이제 ‘옛날 얘기’가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북한이 6자회담 불참 선언 후 첫 요구로 북미양자 회담을 거론한 것은 퍽 상징적이다.
북한은 10일 미국의 적대정책 때문에 회담에 불참한다면서 "우리 정부를 부정하는 미국이 정(굳이) 회담을 하고 싶으면 미국이 만들어 놓았다고 하는 ‘탈북자조직’대표들과 하라"고 비아냥댔다. 이 말의 기저에는 북한이 미국에게 북미대화라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인정하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여달라는 주문이 깔려있다. 이 논리라면 미국은 양자대화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라도 북한을 협상파트너로 대우해주면 만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관측통들은 북미양자협상은 북한이 회담 불참 거부로 내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을 완화·수정해달라는 기본적 조건을 내세우기 위한 일종의 협상카드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다.
한 당국자는 13일 "현재까지 드러난 북측 태도로 볼 때 6자회담이라는 판을 깨기 보다는 6자회담에서의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북한이 일본인 납치문제, 김동식 목사 납치사건 등 악재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북한인권법으로 상징되는 부시행정부의 ‘내부 분열 와해 책동’을 제어할 목적으로 미국과 힘겨루기에 나선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북한의 ‘대북적대시정책 철회’요구는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하영선 서울대교수는 "수령옹위체제인 북한은 경제제재나 군사제재보다도 정치제재에 더 예민하다"며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로 규정하면서 ‘자유전파 정책’을 공언한 부시 2기 행정부와 북한은 서로 타협할 공간이 많지 않다"고 밝혔다. 체제존속이 최대의 현안인 북한이 이번 기회에 부시 행정부의 적대시정책과 ‘일전불사’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한다면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관측통들은 이번주 중 진행될 중국 고위인사의 방북을 통해 북한의 진의가 보다 분명해지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미국 중국 등이 대응책을 가시화하면서 혼미한 현 국면이 어느 정도 정리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 中·러까지 北비난… 4强 한목소리
북한의 핵무기 보유 및 6자 회담 파기 선언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태도가 차갑다. 북한의 조치에 반대한다는 뜻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이번 사태에 관해서는 미·일·중·러 등 남북한을 제외한 6자회담 참가국, 다시 말해 한반도 주변 4강의 이해가 일시적으로 일치한 셈이다.
중국 리자오싱(李肇星) 외교부장은 12일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의 전화회담에서 6자회담이 조속히 재개되도록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북한 외무성 성명 이후 양국은 사실상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중국 관영 매체들의 논조도 북한에 비판적이다. 국영 C CTV는 13일 국제사회가 북한을 비판하면서 6자 회담 복귀를 요구한 내용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반면 이 방송은 북한의 입장을 소개하는 데는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신화통신은 이날 러시아가 북한의 핵 보유 관련 선언이 ‘시대 착오’라고 비난한 전문을 소개했다. 베이징(北京)뉴스 %B등도 논평을 통해 북한을 통렬히 비판했다. ‘동팡 슈오’라는 필명의 한 학자는 "북한의 성명은 북핵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라며 "북한이 매번 이 같이 ‘협박’전략을 구사하기 때문에 세계 어느 나라도 북한이 진실게임을 한다고 믿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거 북한에 대한 비판의 글일 경우 정부 검열에서 삭제 돼온 인터넷 뉴스사이트 ‘시나닷 컴’등에도 북한을 비판하는 글이 쏟아지고 있다. 한 네티즌은 "부엌칼은 음식을 자르는데 쓰이지만 어린이나 미친 사람에게 쥐어져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중국 인민대의 한 교수는 "중국 정부는 북한의 선언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주요 언론 매체들이 북한에 대해 비판을 하도록 묵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고위당국자도 북한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12일 "북한이 갑작스럽게 6자 회담 불참과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했다. 이바노프 장관은 북-미간 양자회담 필요성을 강조한 북한의 태도를 일축하면서 "우리는 북한을 6자 회담의 틀 속에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성명을 낸 의도가 한국-중국-러시아와 미국-일본을 이간질 하기 위한 것이라면, 계산 착오를 한1 셈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뭉치는 핵클럽 회원국의 텃세 의식을 감안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 일본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도쿄TV와의 특별회견에서 "북한은 말하는 것과 진의가 다른 경우가 있다"고 지적하는 등 상대적으로 느긋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베이징=송대수특파원 dssong@hk.co.kr
도쿄=신윤석특파원 ysshin@hk.co.kr
■ 北, 核고비마다 ‘벼랑끝 전술’
북한 핵 문제가 국제사회의 이슈가 되면서 북한은 ‘벼랑 끝 전술’(Brinkman ship)로 미국 등을 상대해왔다. 벼랑 끝 전술은 원만한 타협책 대신 극단적인 위기상황을 유도해 상대방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북한의 6자회담 불참 및 핵무기 보유선언 역시 그 일환으로 분석된다.
◆ NPT 탈퇴 = 북한은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는 전술을 구사, 1차 핵위기가 조성됐다. 3개월 뒤 북미 1단계 고위급 회담이 열리면서 북한은 NPT 탈퇴를 유보하고 12월에는 핵사찰을 수용해 타협의 길이 모색되는 듯 했다. 하지만 북한은 94년 영변 재처리시설에 대한 사찰을 거부하고 5월 폐연료봉 8,000여개를 인출하는 극단적인 강수로 한미 양국을 몰아세웠다. 결국 그 해 6월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과 10월 제네바 북미 합의로 북한은 경수로를 제공 받고 도발적 행위를 자제했다.
◆ 미사일 발사 = 98년 8월 대포동미사일 발사실험도 같은 맥락. 북한은 미사일을 일본 열도 넘어 태평양으로 발사, 미국 등 국제사회의 관심을 단숨에 끌어냈다. 미국은 결국 북한과 뉴욕에서 미사일회담을 개최, 미사일문제만 해결된다면 북미관계 정상화가 가능하다는 뜻을 전달했다.
◆ NPT 재탈퇴·연료봉 재처리 엄포 =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2002년 10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위한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진행을 시인했다. 미국은 중유공급을 중단했고 북한은 NPT 재탈퇴, 핵동결 해제 등의 조치를 취해 2차 핵위기가 조성됐다. 이로 인해 제네바 합의는 파기됐지만 북한이 원하는 북미 양자회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국은 다자회담을 고수했고 일단 북·미·중 3자 회담을 하기로 했다.
북한은 2003년 4월 북·미·중 3자회담을 앞두고 ‘폐연료봉 재처리 완료 준비’이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핵개발을 재개하겠다는 협박으로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양보하지 않았2으며 중국의 설득으로 북한은 일단 6자회담을 수용했다.
정상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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