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섬나라 크레타에는 거짓말쟁이가 참 많았던 모양이다. 바울의 서신인 디도서에도 ‘크레타 사람 가운데 한 선지자가 말하길 크레타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런데 그 선지자 역시 크레타인이다. 따라서 ‘크레타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말이 참말이라면 그 자신도 거짓말쟁이여야 하기 때문에 그의 말은 거짓말이 되고 만다. 거꾸로 그것이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쟁이가 아닌 크레타인도 있고, 선지자인 그의 말은 더더욱 참말일 가능성이 크다. 거짓말을 하면 참말이 되고 참말을 하면 거짓말이 되는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다.
■ ‘러셀의 역설’도 유명하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의 집합을 A라고 정의하고 ‘A는 A에 속하는가, 아닌가’를 따져 보자. A가 A에 속하지 않는다면 정의에 따라 A는 A에 속하게 된다. 거꾸로 A가 A에 속한다면 A는 A에 속할 수 없다. ‘이발사의 역설’도 비슷하다. 스페인의 한 이발사는 집에서 면도하지 않는 사람의 수염만 깎기로 했다. 그럼 이발사 자신의 수염은 어떻게 할까. 직접 수염을 깎으면 깎아서는 안 될 사람, 깎지 않는다면 깎아야 할 사람이 되고 만다.
■ 역설은 사고실험의 소재로는 흥미롭지만 논리 전개에서는 피해야만 한다. ‘거짓말쟁이 역설’은 어떤 사실에 대해 말하는 ‘대상 언어’와 그 말에 대해 말하는 ‘메타 언어’가 계층을 달리한다는 점을 깨달으면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는 말은 대상 언어이고, 선지자의 이 말을 판단하는 ‘참말이냐, 거짓말이냐’는 메타 언어다. 바울은 직관적으로 이 둘을 떼었기에 크레타 선지자의 말을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러셀의 역설’이나 ‘이발사의 역설’은 모두 부분과 전체의 혼동에서 비롯했다.
■ 현실 세계의 역설은 논리적 참, 거짓에 머물지 않고 옳고 그름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더욱 피해야 한다. 그런데도 역사는 수많은 역설을 드러냈다. ‘베르사유 체제’ 아래 신음하던 독일을 구하겠다던 히틀러의 다짐은 참혹한 전쟁을 불렀고, 계급 없는 사회를 겨냥한 혁명은 공산당 독재로 이어졌다. 현재의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정치인이 오히려 국민을 피곤하게 하고, 계층 구조 완화를 다짐하던 세력이 스스로 계층을 이뤄가고 있다. 논리학의 역설과는 달리 해결 전망조차 아득한 진정한 역설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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