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33도10분, 동경 126도17분. 제주도에서 남쪽으로 30분 뱃길 쯤 되는 곳에 ‘바람의 섬’ 가파도(면적 0.85㎢)가 있다.
이곳 가파초등학교는 인근 마라분교(마라도 소재)를 거느린 국토 최남단의 학교다. 전교생이 고작 22명(마라분교 3명 포함)이지만 역사는 59년이나 된다. 지난 5일 그 긴 역사에서 기록될 ‘사건’이 벌어졌다. 1946년 개교 이래 처음으로 졸업앨범이 전달된 것. ‘기쁘고 슬픈’ 마음에 졸업식 내내 우느라 눈이 퉁퉁 부은 김경주 신건 김명철군, 강승미양 등 졸업생 4명은 예기치 않은 선물에 눈이 동그래졌다. 지난해까지 졸업생 1,116명은 아무도 ‘돈 많이 드는’ 졸업앨범을 받아보지 못했다. "올해도 앨범이 없는 줄 알았는데 너무너무 신기해요."
44쪽짜리 버젓한 앨범엔 졸업생 사진뿐 아니라 운동회 소풍 서울나들이 등 전교생의 1년 활동과 섬의 역사와 풍경이 실렸다. 아이들의 그림과 기행문, 시도 실려있다. 신건군은 "뭍(가파도에선 제주도가 뭍이다)으로 진학하는 게 슬펐는데 동생들 사진도 많아서 기쁘다"고 자랑했다. 졸업생만 받은 게 아니다. 59년 만에 만든 귀중한 앨범인지라 재학생과 유치원생(9명), 마을 주민까지 앨범을 선물 받았다. 함석중 교장은 "학교앨범이자 아이들의 문집이며 가파도의 모든 것을 담은 앨범"이라고 설명했다.
가난한 섬 아이들이 꿈도 꾸지 못한 총제작비 500만원짜리 앨범(60여부)을 선물한 단체는 제주 연동로타리클럽(회장 손정하)이다. 이 단체는 지난해 9월 이 학교에 급식용 김치 1년 분을 전달하면서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 아이들의 열악한 교육환경이 안타까웠던 클럽 회원들은 틈틈이 섬을 방문해 치약과 칫솔을 나눠주고 의사 회원들이 나서 의료봉사활동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졸업앨범이 있어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손 회장은 "매년 졸업사진 한 장만 달랑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평생의 추억이 될 졸업앨범을 꼭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뜻을 전하자 선뜻 나서는 이가 있었다. 충청도가 고향이지만 20년째 제주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김진해씨다. 그가 앨범 제작부터 비용까지 모두 도맡았다. 하지만 그는 "할 일을 한 것뿐"이라며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했다. 학교를 직접 찾아 사진을 찍고 내친김에 아이들의 작품까지 모아 담은 그는 "기존의 졸업앨범 틀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아름다운 마을과 맑은 동심을 담은 생애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 학교 5·6학년 담임인 이주열 교사도 한몫 했다. 그는 당초 아이들에게 졸업CD라도 선물할 요량으로 지난해 초부터 아이들 사진 1,200여장을 찍어두었다. 가파도 주민이자 이 학교 26회 졸업생인 박학익(46)씨는 "전교생이 100명이 넘던 시절에도 A4용지 절반 크기의 졸업사진을 나눠주는 게 전부였다"며 앨범을 만들어준 이들에게 고마워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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