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추진해 온 국내 은행에 대한 외국인 이사 수 제한 조치가 최근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에 매각된 제일은행을 시작으로 점진 도입된다. 금융당국은 외국 자본의 곱지 않은 시선을 감안해 우선 권고 형식을 취할 예정이어서, 법제화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에 본격 착수한 것으로 풀이된다.
금융감독원 고위 관계자는 11일 "SCB가 제일은행 영업 양수도 인가를 신청해 오면 이사의 절반 정도를 내국인으로 선임하도록 권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금융당국이 개별 은행의 이사 선임에 개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지만, 은행의 공공성 유지를 위해 권유를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금감원은 이 같은 권고 조치만으로도 충분히 효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금감원의 다른 관계자는 "투기적 자본과 전략적 자본은 국내 영업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며 "굳이 금융당국의 권고가 아니더라도 씨티나 SCB 등 전략적 투자자들은 해당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기 위해 내국인 이사나 임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제일은행은 16명의 이사진 중 13명이 외국인으로 구성돼 있으며, 한국씨티은행과 외환은행 역시 각각 이사 13명중 8명, 9명 중 6명이 외국인이다. 금감원은 씨티와 외환 등 다른 외국계 은행에도 권고 형식을 빌어 내국인 이사 수를 늘리도록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금융계에서는 금융당국의 이 같은 움직임을 법제화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무턱대고 법을 만들었다가 외국 자본의 역풍을 맞을 수 있는 만큼, 사전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내 은행의 외국인 이사 수 제한 문제는 지난해 하반기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이 처음 제기한 이후 동조 여론이 확산됐고, 급기야 여야 국회의원 21명이 지난달 말 ‘금융기관 이사의 2분의 1 이상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선임해야 한다’는 내용의 은행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해놓은 상태다. 하지만 외국 자본을 비롯한 해외 여론이 여전히 비판적인 데다, 국내 거주 요건 등을 명문화하는 거주지 제한 규정 등 세심하게 가다듬어야 할 부분도 적지 않아 법안 마련까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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