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회색영혼’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프랑스 북동쪽 전선(戰線) 배후의 자그마한 마을에서 일어난 10살 소녀의 피살 ‘사건’이야기다. 군복을 입고 몇 마일만 이동하면 ‘합법적인 살인’이 횡행하는 전시 공간. 하루에도 열 두 번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지는 ‘병든 욕망’과 현실의 요구가 일치하는 그 시기에 일어난 ‘진짜 살인’ 이야기다.
1999년 프랑스 문단에 불쑥 나타나 굴지의 문학상을 잇달아 거머쥐고 이 책으로 2003년 ‘르노도상’을 차지한 필립 클로델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다. 그는 ‘합법적 살인’의 지척에 놓인 ‘진짜 살인’과 그 사건의 배후에 도사린 인간의 양면성을 잔인하리만치 세밀하게 들추어내고 있다.
소설은 은퇴한 경찰관인 주인공 ‘나’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그래도 말해야 한다. 이십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살라버린 그 사건을, 그 회한과 의문을. 칼을 들고 배를 가르듯 비밀을 까발릴 것이다.’
전쟁터 배후 마을 V는 전쟁 덕에 먹고 사는 마을이다. 전선에 투입되고 부상을 당해 후송되는 병사들이 수시로 들고나는 초입. 마을 사람들은 전쟁터 대신 군수공장에 동원된다.
이야기는 마을 외곽 저택에서 독신으로 사는 냉혹한 노(老)검사 ‘데스티나’의 등장으로 시작해서, 그의 관련된 보이지 않는 갈등들로 이어진다. 그는 결혼 6개월 만에 부인과 사별하고 ‘성채’라 불리는 저택에서 온갖 욕망과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 채 산다. 그의 유일한 사적(私的) 대외활동은 마을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 일. 그 레스토랑에는 꽃 같이 예쁘고 천사처럼 순결해 온 마을 사람들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주인의 열 살짜리 딸 ‘벨’이 있다. 진짜 살인의 희생자다.
그로부터 1년 전 한 여교사의 자살사건도 있었다. ‘교사를 하기에는 너무 예쁜’ 스무 살의 리지아는 공석이 된 교사 자리에 자원해 온 외지인. 언제나 밝고 환한 미소로 뭇 마을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그는 검사의 저택 언덕 위 집에 세 들어 살다 스스로 목을 맨다.
경찰관인 ‘나’는 이들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 검사가 ‘벨’을 각별히 생각했고, 리지아를 두고도 혼자 속앓이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짐승의 가죽을 벗겨 파는 조세핀은 검사가 벨과 함께 사건 당일 범행장소에 함께 있는 것을 봤다는 말을 친구인 ‘나’에게 전한다. 하지만 마을의 속물적 판사는 증언을 하러 간 조세핀을 무고혐의로 감금하고 나에게도 입조심을 당부한다. "귀찮게 굴지 마시오, 나도 당신을 귀찮게 안 할 테니까."
바로 ‘각자가 속한 세계의 규칙’이다. ‘그것은 우리를 닭똥 보듯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그런 높은 사람의 영혼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썩어빠졌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그들에겐 종말의 전주곡’이던 것이다. 살인혐의는 뜻밖에 탈영병으로 체포된 두 명의 순박한 청년에게 덮씌워지고, 그들 중 한 명은 자살로 한 명은 총살로 숨진다.
소설은 추리소설의 형식을 차용하되 박진감 넘치는 사건 자체의 전개가 아니라, 사건의 정황과 관련자들의 내면을 좇는다. ‘나’는 검사 데스티나와 여러모로 흡사하다. 아이를 낳?%? 아내가 숨진 뒤 그 역시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 듯 고독하게 살았고,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일기를 쓰고 있다. ‘나는 쓴다. 그게 다다. 그건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지난 시간과의 대화. 나는 사람들의 초상을 낱낱이 기록한다.’
‘나’가 긴 세월 그 ‘사건’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소설 끄트머리의 반전을 통해 밝혀진다. 그것은 은폐된 진실과 그 음모의 방조자로서의 죄의식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진실,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그의 이력 때문임이 드러난다. 20여년 동안 고독하게 까발려 온 ‘사건’의 비밀이란 결국 ‘나’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언젠가 조세핀이 했던 말 "완전히 시커먼 것도 없고, 완전히 새하얀 것도 없어. 우리 모두처럼 빼도 박도 못할 회색이지"와 숨지기 전 데스티나가 펼쳐 읽던 팡세의 한 구절 "코미디의 마지막 장은 언제나 피비린내 난다. 그 전 장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우리는 결국 머리 위로 흙을 덮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되풀이 된다"도 ‘나’의 진실을 통해 선연히 감득된다.
‘실존’의 만만찮은 문학적 무게를 짊어졌음에도, 감각적인 문장과 추리소설식 전개로 무겁지 않게 읽힌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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