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과거사위가 3일 7개 우선 조사 착수 사건을 선정, 발표한 것은 의혹만 무성했던 과거사건의 베일을 벗길 계기를 마련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에 의해 인권유린 및 탈법, 조작 행위 등이 자행된 의혹이 있는 사건들에 대해 민관이 합동으로 본격 메스를 대는 것이다.
과거사위는 우선 실체적 진실규명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 같은 유형의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는데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통해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 측에게도 신원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충일 위원장이 "객관적 실체에 접근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라며 "우리 모두가 당사자인 만큼 진실고백과 용서·화해의 길을 통해 새 시대를 열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것은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조사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KAL 858기 폭파 등 엄청나게 방대한 사건을 조사하기엔 15명의 위원과 20명의 조사관 등 35명이라는 인력은 부족한 게 현실이다. 게다가 수사권을 갖고 있지 않은 과거사위는 결국 국정원 자료와 관련자 고백이라는 조사방법에 기대야 하는데 이 또한 쉽지 않다. 안병욱 간사는 "국정원에 예상만큼 자료가 많이 보존돼 있지 않다"며 "보존된 문서도 1차 자료는 드물고 2,3차 자료가 대부분"이라고 토로했다. 국정원 전·현직 직원을 비롯한 관련자의 고백 역시 현재로선 희망적 기대일 뿐이다.
오 위원장이 "제도적으로 진실고백을 할 수 있는 제도나 장치가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누차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만치 않을 정치적 논란 역시 넘어야 할 산이다. 오 위원장이"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고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겠다"고 엄정 중립 의지를 분명히 했지만, 논란은 불가피하다. 정수장학회, 동백림 사건 등 5개가 박정희 정권 때 벌어진 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박근혜 대표와 한나라당의 반발과 정치적 공방이 가열 될 소지가 다분하다.
또한 2년간의 과거사위 활동기한을 1년 더 연장할 경우 차기 대선 직전까지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정치 공방이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녹용기자 ltrees@hk.co.kr
■ 김형욱 실종/ 美망명후 反박정희 활동… 佛서 행불
1979년 10월 파리의 한 카지노에서 행방불명된 김형욱(당시 54세) 전 중정부장. 이 실종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최대 미스터리로 꼽힌다. 박 정권과 김씨의 악연 때문에 청와대 배후설이 끊이지 않았으나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씨는 역대 최장수인 6년 3개월간 중정부장으로 재임한 박 정권의 핵심 중 한 명이었으나 권력에서 멀어지자 73년 미국으로 돌연 망명했다.
김씨는 이후 박동선 로비사건을 조사하던 미 의회의 프레이즈 청문회 등에 나가 김대중 납치사건, 인혁당 사건,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 등 박 정권의 치부를 거침없이 쏟아놓았다. 자신을 회유하려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신(私信)까지 공개했다.
박 정권은 김씨를 회유하기 위해 윤일균 당시 중정 해외담당 차장 등 친분 있는 인사를 잇달아 밀사로 보내 150만 달러 제공, 신분보장 등을 조건으로 파상로비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김씨는 오히려 79년 9월 미국에 체류중이던 김경재 전 의원을 통해 ‘권력과 음모’란 회고록을 출간했다. 회고록은 ‘치정’(정인숙 사건)에서 ‘대북공작’(실미도)까지 박 정권의 어두운 이면을 낱낱이 폭로했다. 박 정권은 발끈했고 이후 김씨는 뚜렷한 이유없이 뉴욕에서 파리로 건너간 직후인 79년 10월 7일 오후 7시, ‘르 그랑 세르클’이란 카지노를 들렀다가 실종됐다. 회고록이 나온 지 불과 한달 만미다. 이후 "중정요원에게 납치된 뒤 청와대에 끌려와 사살당했다", "중정요원이 납치해 파리근교에서 살해한 뒤 센강에 버렸다"는 소문은 물론 "산채로 서울로 끌려와 차에 태워져 폐차장 압착기에서 최후를 맞았다"는 얘기도 있다.
이동국기자 east@hk.co.kr
◆ "박종규씨가 日 한국계 폭력배 동원설"
박사월이라는 필명으로 ‘김형욱 회고록’을 썼던 김경재(사진) 전 의원은 3일 김씨 실종사건의 배후에 대해 "박종규 전 경호실장이 일본 오사카의 한국계 폭력배를 동원했다는 얘기가 있어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지금까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의 과잉충성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얼마 전에 박씨가 개입했다는 신빙성있는 증언이 있어 오사카에도 다녀왔다"고 전했다.
그는 "오사카 폭력조직의 대부가 이미 11년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얘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아직 결론을 내리기는 이르다"며 "과거사위의 조사과정에서 새로운 자료가 나올지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김형욱 회고록’ 완결판인 ‘박정희 시대의 마지막 20일’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김씨가 실종되기 직전인 1979년 9월 30일까지의 녹취 테이프를 갖고 있다"며 "실종사실이 알려진 직후부터 10·26 직전까지 숨막혔던 움직임과 곁에서 지켜본 김씨 가족과 미국 정부의 움직임도 다룰 것"이라고 소개했다.
과거사위의 조사 착수와 관련, 김 전 의원은 "김씨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많긴 하지만, 그의 인권도 존중돼야 한다"며 "김씨 사건에 대한 조사가 정치적으로 남용돼선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 인혁당·민청학련/ "北지시로 유신반대" 조작 의혹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은 반유신 인사 8명을 사형 선고 직후 20시간 만에 사형, ‘사법살인’이란 오명을 얻은 유신시대 대표적 공안조작 의혹사건이C다. 1974년2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중심으로 유신 반대 투쟁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은 그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64년 적발된 인혁당(1차 인혁당 사건)을 재건해 북한의 지령을 받아서 민청학련의 유신 반대 투쟁을 배후 조종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250여명이 구속됐고, 인혁당 계열의 여정남 도예종 등 8명이 사형선고를 받아 20시간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인태 의원, 이철 전 의원, 김지하 시인 등 민청학련 관계자들도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대부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당시 국제법학자협회는 사형이 집행된 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날’로 선포했고, 담당 공안부2 검사들마저 기소장 서명을 거부하는 ‘항명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군사법원 재판부의 공판 조서 허위 작성과 용공 조작 여부가 쟁점이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 동백림 사건/ 유럽 유학생등 동베를린·北 방문
1967년 7월 8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북한이 동베를린(동백림)을 거점으로 유럽 거주 한국 유학생, 예술가 등을 포섭해 대남적화 공작을 벌였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북한은 57년부터 동백림에 조선노동당의 유럽공작책인 이원찬을 상주시키고 황성모 임석진 김중태 현승일, 고 이응로 화백, 음악가 윤이상 등 194명을 포섭했다. 이들은 58년부터 67년까지 동독주재 북한대사관을 오가며 이적활동을 했고 일부는 평양에서 밀봉교육을 받았다.
67년 12월 3일 조영수 정규명 등 2명에게 사형, 정하룡 강빈구 윤이상 어준 무기징역 등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국제적 항의로 2년 만에 풀려난 윤이상은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한 것은 사실이지만 음악가로서 였다"며 "굳이 따진다면 민족주의자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과거사위는 이 사건이 중정 발표대로 북한의 조종에 의한 간첩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일부가 단순히 동독이나 북한을 방문한 사건이었는지를 밝혀야 한다.
조경호기자 sooyang@hk.co.kr
■ 중부지역당 사건/ 최대규모 간첩단… 고문 논란
중부지역당 사건은 ‘남로당 이후 최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 일컬어지지만, 14대 대선을 두 달 앞둔 1992년 10월에 전모가 발표됐다는 점에서 ‘북풍’ 의 하나로 기획·조작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해말 이 사건 연루자였던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의 조선노동당 가입 의혹과 당시 안기부 수사책임자인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의 고문 조작 논란 등이 불거지면서 새삼 주목을 끌었다.
당시 안기부는 거물간첩 이선실에 포섭된 황인오씨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구축, 간첩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민중당 공동대표 김낙중씨와 정책위원장 장기표씨 등 62명이 구속되고 수배자만 300여명에 달했다. 또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 일부 인사의 연루설이 나오는 등 대선 정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법원은 1심에서 ‘민족해방애국전선’이라는 자생적 반국가단체 활동만 인정했지만, 고등법원이 이를 뒤집고 중부지역당의 실체를 인정했다. 안기부의 고문조작 여부, 이선실의 실체, 중부지역당과 민족해방애국전선과의 관계 등이 규명돼야 할 대목이다.
송용창기자
■ KAL 機 폭파/ 김현희 실체 등 수사결과 불신
1987년 11월 29일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KAL) 858기가 미얀마 안다만 상공에서 폭파됐다. 당시 안기부는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라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가 기내에 라디오 폭탄을 설치한 뒤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에서 내려 도주했다고 발표했다. 김승일은 바레인공항에서 체포되기 직전 음독 자살했고, 김현희는 체포돼 12월15일 국내로 압송됐다. 사건 발생 3년만인 90년 3월27일 대법원은 김현희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16일만에 특별사면됐다.
그러나 정부가 수사결과 발표의 유일한 근거로 삼았던 김현희의 자백을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실제 김현희가 안기부 조사과정에서 밝힌 평양의 집주소, 부친의 직책과 근무지, 바그다드까지의 이동 경로와 항공편 등에 대한 진술이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또 안기부가 공개한 김현희의 어릴 적 사진에 나온 귀 모양이 김현희의 귀와 다르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에 따라 과거사위는 김현희의 실체를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사고기 잔해에 폭발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사고발생 2년 4개월만에 폭발지점에서 200㎞ 이상 떨어진 곳에서 동체와 고무보트가 발견됐지만, 화약 잔재 등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가 항공기 사고분석의 핵심 열쇠인 블랙박스와 기체 잔해가 수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 발생 열흘만에 현지조사단을 철수시킨 점, 대선 전날 김현희를 전격 입국시킨 점 등은 당시부터 정치적 의혹을 증폭시켰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 김대중 납치사건/‘DJ 납치’ 朴대통령 개입했나
1973년 8월 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도쿄(東京)에서 피랍된 뒤 129시간 만에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난 사건이다. 한일 외교문제로 비화한 박 정권의 대표적인 정치공작.
72년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에 머물던 DJ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미국 등에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반유신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일본 내 한민통 결성을 닷새 앞두고 통일당 양일동 당수를 만나러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 갔다가 한국 정보기관원에 납치됐다. 일본 경찰청은 현장에서 주일한국대사관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지문 등을 채취하고 관련자 출두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일본은 주권침해라며 반발하다 김 서기관의 해임, DJ의 해외체류 중 활동면책, 김종필 당시 총리의 사과방일 등을 약속 받고 물러섰다.
이후락 당시 중정부장의 과잉충성이란 설이 있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가 핵심이다. 납치자들이 DJ를 동해에 수장하려 했는지도 규명해야 할 대목이다.
이동국기자
■ 정수장학회/ 5·16직후 부일장학회 강제헌납 의혹
5·16 직후 중앙정보부가 개입, 당시 부산지역 기업인이었던 고 김지태 삼화고무 사장의 부일장학회를 강제로 국가에 귀속시켰는지가 조사의 핵심이다. 2, 3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 씨는 5·16 쿠데타 후 재산해외도피 혐의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몇 달 조사를 받다가 1962년 6월20일 부일장학회의 부산시내 땅 10만147평과 부산일보 등의 주식을 포기, 국가에 헌납하는 각서를 썼다.
부일장학회를 모태로 5·16 장학회가 출범했고 82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에서 한자씩을 딴 정수장학회로 탈바꿈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그 동안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으로 있다가 3일 사퇴했다. 때문에 정치권의 갑론을박이 수반될 전망이다. 정수장학회는 현재 문화방송 주식 30%와 부산일보 주식 100%등을 소유하고 있다.
당시 공식 서류를 보면 김씨가 국가에 자진 헌납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유족들은 군부세력이 강탈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8월에는 자진납부설을 부인하는 내용을 담은 김씨의 비망록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비망록은 김씨가 포기각서를 쓴 지 두 달 뒤인 62년 9월4일 서울 시내 음식점 아서원에서 군부측 고 모 장군과 5·16 장학회 초대 이사장 이 모씨 등이 나눈 대화를 적어둔 메모다.
경향신문 강제매각은 중앙정보부가 비판적 논조의 경향신문을 강제로 판 사건. 중정이 65년4월 경향신문 이준구 사장 등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고 67년1월 이 사장의 부인 등을 연행한 가운데 경매를 실시, 기아산업에 매각했다. 조사위는 중정이 금융권을 조정했는지, 경매를 배후 조정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동국기자 east@hk.co.kr
◆ 朴대표, 장학회 이사장직 사퇴/ 주변 정리후 ‘정면 대응’ 의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3일 정수장학회 이사장직 사퇴의사를 밝힌 것은 당 안팎의 집요한 과거사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한 결정이다. 박 대표는 지난해 7월 대표로 선출된 후 이 문제로 인해 여권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고, 최근엔 당내 비주류의 과거 단절 압박에 직면했다.
여권이 제기하는 3공의 과거사 문제 중 정수장학회는 박 대표가 직접 관련된 사안. 따라서 박 대표의 이사장직 사퇴는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논란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전여옥 대변인은 "야당 대표로서 주변을 정리, 당당하고 자유롭게 (여권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표는 "국정원이 이런 일을 조사하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이렇게 하는 것은 또 하나의 과거사가 될 것"이라고 불쾌함을 표시했다고 전 대변인이 전했다.
이사장직 사퇴시점이 국정원의 과거사 조사착수와 겹친 점은 오비이락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박 대표는 "지금까지 여러 번 정기이사회에서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박 대표의 향후 대응 방식이 주목된다. 과거사문제는 박 대표가 대권주자로서 반드시 넘어야 할 숨가쁜 고개다. 한 측근은 "3공의7 과거사에 대한 공과 과를 분리해 과는 사과하겠지만, 정부에 공도 함께 조사할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당 내에는 이사장직을 사퇴했다고 해서 박 대표가 3공의 그늘에서 자유로워 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다수다.
제천=권혁범기자 hbkwon@hk.co.kr
■ 조사委 일문일답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민간 조사위원 간사인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3일 "과거 정보기관이 한국 정치사의 여러 분야에서 때에 따라 과도하게 불법적으로 개입한 의혹을 받고 있는 7개 사건을 선정했다"고 조사대상 선정배경을 설명했다. 다음은 안 교수 등과의 일문일답.
_7건 이외의 의혹사건 조사는.
"언제라도 사건 기초조사 이후 진실조사 착수가 가능하면 할 것이다. 다만 조사인력 부족 때문에 사회적 요구를 충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점은 현실적 한계다."
_과거사위에 수사권이 없어 조사 실효성에 문제가 있지 않나.
(국정원측 간사 김만복 국정원 기조실장)"국정원이 보유한 자료를 중심으로 조사하고 당시의 관계자들에게 국정원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설명해서 고백을 받아내도록 하겠다."
_진실규명 이후 관련자들의 책임문제는.
(오충일 위원장)"의혹사건에 대한 객관적 실체접근이 위원회의 목적이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지 어떤 사람들을 처벌하자는 뜻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진실고백을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나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
_사건조사는 무엇을 근거로 하나.
"관계자 증언과 국정원 내부 문서자료다. 그런데 보고를 받고 실제 문서를 확인했더니 예상한 만큼 자료가 보존돼 있지 않다. 2차, 3차로 가공한 자료들이 보존돼 있는데 행간에 숨어있는 내용을 최대한 추려내 활용하겠다."
_일부 사건조사에 대해 정치적 해석이 나오는데.
(오 위원장)"정치권에서 문제를 삼는 것 역시 정치적이다. 이런 저런 고려로 조사를 미루는 것 역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진실규명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정상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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