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화재청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글 광화문 현판을 정조의 필체로 교체한다는 소식을 멀리 타향에서 듣게 됐다. 이는 신중하지 못한 일이다. 우리의 문화유산이 또 정치권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문화재청은 박 전 대통령의 친필 광화문 현판이 한글인데다, 글자 방향도 거꾸로 돼있어 교체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정조의 해서체를 따다가, 그것도 37년 만에 한문 ‘광화문(光化門)’으로 바꾸려는 것인가.
‘옛 것은 옛 것 그대로’라는 논리를 적용하자면 광화문에는 원래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전이 썼던 ‘정문(正門)’이란 친필 현판을 달아야 옳다. 태조가 경복궁을 창건했을 때 광화문은 정도전의 주청대로 ‘정문’이었고 현판글씨 역시 정도전의 것이었다. 광화문으로 바뀐 것은 1425년(세종7년)이다.
임진왜란(1592년)으로 경복궁은 폐허가 됐으나 광화문과 북쪽의 신무문은 담장과 함께 수리해 볼품 사납지않게 겉치레를 했다. 이때 현판 글씨는 조윤량으로 되어 있으나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경복궁 중건(1864년)당시 광화문 현판은 서화가 정학교가 쓴 한자체였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1968년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박 전 대통령이 친필 한글 현판을 걸었다.
이처럼 역사를 따져봐도 굳이 정조의 글씨가 돼야 할 이유는 없다. 박 전 대통령의 현판은 그대로 보존돼야 한다. 이는 ‘옛것은 옛것으로 둔다’는 원칙에서 볼 때도 그렇다. 박 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잘못을 범했다고 해서 그의 글씨마저 떼어 훼손해버리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소아병적 행동으로 비판 받아야 한다. 역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존중할 줄 아는 미덕이야말로 민주시민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
지난 역사를 돌아보건대 1380년 고려 공민왕이 안동파천 때 쓴 영호루 현판이나 태조의 명에 의해 정도전이 쓴 명부전(지금의 서울 봉원사) 글씨 등은 역사의 격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의 글씨 역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이유다. 굳이 광화문 현판을 교체하고 싶다면 정조의 필체가 아니라 차라리 원래 현판인 정도전의 ‘정문’을 달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최근 한일협정 문서 공개 등을 계기로 박 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논쟁이 확산되고 있지만, 그것과 광화문 현판 문제를 연결지을 것은 아니다.
문화재청 담당자들에게 한마디하고 싶다.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 그 자체가 역사가 되고 후손에게 교훈이 될 것을 왜 모르는가. 나는 훗날 이 글씨도 두고두고 역사로 남기를 기대한다. 각자 자신의 생각과 의도로 당장의 상황을 대하지 말고 좀더 길고 넉넉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자. 그 것이 역사 앞에 진정으로 당당해지는 길이다.
정권수 뉴욕거주 소설가·삼봉 정도전 19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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