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에로가 빠져서는 안 될 터인데….
B:그럼요, 이번 ‘○○’를 봐요. 그렇게 크게 취급한 ‘재만 동포문제’니 ‘신간회 해소문제’니 하는 것은 성명이 없어도 ‘침실박람회’는 간 데마다 야단들입니다.
C:참 ‘○○’ 이번 호는 그 제목 하나로 천 부는 더 팔았을 걸… 그렇지만 너무 노골적입디다.
D:그래도 글쎄 그렇게 안 하곤 안 돼요. 잡지란 무엇으로든지 여러 사람 화두에 오르내릴 기사가 있어야 그거 어느 잡지에서 보았느냐 어쨌느냐 하고 그 책을 찾게 되지….
E:사실이야. 아무래도 번쩍 띄는 큰 ‘에로’ 제목이 하나 있어야 돼. 더구나 봄인데.
1920년대부터 흥사단의 국내 조직처럼 활동하던 수양동우회 기관지 ‘동광(東光)’ 1931년 어느 호에 실린 소설은 당시 잡지회사의 편집회의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대중문화에 ‘에로’라는 코드가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은 게 언제쯤일까. 경제가 급성장하던 70년대 이후일까, 소설가 정비석이 ‘자유부인’을 신문 연재하면서 화제를 불러온 50년대 중반일까. 30년대에 이미 조선 반도에 ‘에로’ ‘그로’ ‘난센스’라는 신조어가 대유행했다고 하니, 시작을 좀더 거슬러 올라 잡아야 할 것 같다.
일본을 통해 거침없이 서구문물이 흘러 들어오던 일제강점기의 풍속 연구가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이른바 근대연구 붐을 타고 이 시기 생활사를 탐구하는 책들이 여러 권 나왔고, 현실문화연구에서 시리즈처럼 펴낸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만문만화(漫文漫畵)로 보는 근대의 얼굴’ ‘연애의 시대’ 등은 대중적인 인기도 만만찮게 누렸다.
살림출판사가 살림지식총서 150호 특집으로 30년대 풍속의 면면을 재조명한 문고본 6권을 한꺼번에 내놓으며 이 바람에 가세했다. 교양 문고본이라 권당 100쪽이 좀 안되는 적은 분량이지만 에로티시즘, 그로테스크 문화, 연애와 신여성의 행태 등 구체적인 소재를 파고 들어 당시 풍속을 매우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모던 걸, 여우 목도리를 버려라-근대적 패션의 풍경’(김주리 아주대 강사), ‘누가 하이카라 여성을 데리고 사누-여학생과 연애’(김미지 성공회대 강사), ‘스위트 홈의 기원’(백지혜 한성대 강사), ‘대중적 감수성의 탄생-도박, 백화점, 유행’(강심호 광운대 강사), ‘에로 그로 넌센스-근대적 자극의 탄생’(소래섭 가톨릭대 강사), ‘소리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이승원 인천대 강사)은 당시 풍속과A 문학 텍스트를 긴밀히 연관해 해석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저자들은 다수가 이 시기 풍속에 관심을 둔 서울대 신범순 교수의 지도로 근대문학을 전공한 30대 초·중반의 젊은 학자들. 신 교수는 "근자의 일제강점기 풍속 연구들은 세태변화를 계급, 이데올로기 등 사회구조의 문제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이 거시적인 틀을 깨고 당시 문화와 문학의 다양성, 미시적인 주체성을 추적하려는 노력이 담겨있다"고 말했다.
이 시기의 세태가 그 실상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재미있다는 것은 다른 책을 통해 이미 입증되고도 남았다. 화장하고 실크 스타킹을 신어 패션을 앞서 간 남자들, 연애편지 막기에 고심하는 교사들의 모습이나, 모델하우스가 탄생하고 피아노가 재산목록 1호로 등장하는 흥미로운 사연 들이 권마다 즐비하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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